[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50) 김성규(金星圭)의 『초정집(草亭集』)과 김병휘(金炳輝)의 『연파집(蓮坡集)』

2025-06-27

『초정집』(草亭集)

충청도 연풍 출신의 학자이자 관료 김성규(金星圭)의 시문집이다. 김성규는 동학농민혁명 발발 직후인 1894년 4월 전라감사로 부임한 김학진(金鶴鎭)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재임하였다. 『초정집』에는 재임하는 동안 전라감사의 이름으로 내놓은 동학농민군에 대한 효유문 4종, 전라도 53개 군현에 내린 감결(甘結) 2종 등 7종의 동학농민혁명 관련 공문이 실려 있다. 이 자료들은 1894년 5월 전주화약이 이루어지기 직전 농민군과 김학진 및 관군 측과의 관계와 교섭 상황, 전주화약 이후 농민군의 폐정개혁 활동에 대응하는 전라감사의 입장과 ‘관민협치’가 이루어지는 과정, 이를 기반으로 전라도 각지에 집강소가 설치되는 경위 등을 매우 소상하게 보여준다.

여기서는 이 가운데 4종의 효유문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두기로 한다. 먼저 「효유도내난민문(曉諭道內亂民文)」이다.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너희들은 반드시 죽임을 당할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② 너희들이 호소하려는 억울함은 이미 잘 알고 있다. ③ 호소하려 해도 살펴주는 자가 없고 도망하려 해도 살아날 길이 없게 되었는데 평소에 화심(禍心)을 품고 있던 흉괴(凶魁)들이 터무니없는 말로 선동하여 이와 같은 망측(罔測)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④ 흉괴 이외에는 살 길이 있다. 흉괴 외에는 징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국왕의 교시이다. 병기를 반납하고 성문을 열고 흉괴를 포박하여 항복하라. 이 효유문은 한편으로 농민군에게 빨리 해산할 것을 겁박하면서 촉구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농민군 지도부와 대중 사이를 이간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글이다. 효유문 앞머리에 전라감사 김학진이 1894년 4월에 내린 것으로 명시되어 있으나, 김학진은 이 글에서 전라감사로 부임하던 중 금강에 이르렀을 때 전주 함락 소식을 접하였다는 점, 그리고 바로 이어서 농민군이 자기에게 원통함을 하소연하였다는 점을 적시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것은 5월 4, 5일경 농민군 측이 김학진에게 원통함을 호소하며, 경기전(慶基殿)과 조경묘(肇慶廟)가 파괴된 것은 초토사 탓임을 주장하면서 빨리 입성하여 자신들의 처지를 살펴줄 것을 요청한 <고급문장(告急文狀)>을 보낸 다음에 작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한편 순변사 이원회가 심영병(沁營兵)을 이끌고 5월 18일, 초토사 홍계훈은 장위영(壯衛營) 을 이끌고 5월 19일 전주를 떠나 서울로 향한 직후인 5월 20일 전후 농민군에 대한 선무(宣撫)와 안집(安集)을 홀로 감당하게 된 김학진은 농민군측에 재차 효유문을 보내 무장을 해제할 것과 조속한 해산을 촉구하며 6개항의 수습방안을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국왕의 뜻을 받들어 폐정(廢政)을 일체 개혁하기로 하였으며, 작은 폐단은 감영에서 개혁하고 큰 폐단은 중앙에 보고하여 혁파하도록 할 것이라는 점, 각 면리마다 집강을 두어 만일 원통한 일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집강이 사유를 적어 감영에 소송하여 공정한 심판을 기다리라는 점, 병기는 모두 각자 거주하는 군현에 반납하라는 점, 금년도의 부세는 모두 면제한다는 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김학진의 제안이 농민군에게 그대로 수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관민상화(官民相和)에 의한 집강소 시기 농민군의 폐정개혁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김학진의 수습방안에 대한 농민군들의 대체적인 반응은 ‘비웃을 따름’이었다고 할 정도로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외세의 개입이라는 정세변화에 따라 경군이 서둘러 철수함으로써 전라도 일대에 관군의 군사력이 매우 취약해지자 이 무렵부터 전라도 곳곳에서 농민군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번 효유문을 내려 신칙했는데도 농민군들의 활동이 곳곳에서 재개되자 김학진은 농민군에게 세 번째의 효유문을 내려 병기를 반납하고 귀가안업(歸家安業)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어 6월 7일에도 네 번째의 효유문을 내렸다. 5월 20일경의 두 번째 효유문에서는 “원통한 일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강이 사유를 적어 감영에 소송하여 공정한 심판을 기다리면 될 것이다”고 하여 집강의 기능 가운데 민원 처리 부분이 강조되었으나, 후자에서는 “근신(謹愼)하고 의(義)로운 사람으로 집강을 삼고 부랑배를 보는 대로 포박해 해당 지방관에게 넘겨 처벌하도록 하라”고 하여 무뢰배들이나 사적인 설분(雪憤) 행위를 일삼는 농민군들을 금단하는 치안유지 기능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연파집』(蓮坡集)

『蓮坡集』은 강진 유생 김병휘(金炳輝, 1842~1903)의 문집으로 모두 4권 2책이다. 김병휘는 1842년 강진 용두리에서 노택(魯澤)의 아들로 출생하였며, 자(字)는 민오(玟五)이며 연파(蓮坡)는 그의 호이다. 향리에서 가학을 통해 학문을 익히고 송병선(宋秉璿)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김한섭(金漢燮), 정의림(鄭義林) 등과 교유하였다. 갑오년에 즈음하여 향리에 용강서숙(龍岡書塾)을 개설하고 후학을 가르치다가 전도정(前都正) 박창현(朴昌鉉), 진사 김병윤(金柄潤) 등과 모의하여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한 민보군을 결성하였으며, 갑오 12월 7일과 10일 강진성과 강진 병영성 전투에 참여하여 농민군의 공격을 막고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3년 1월 23일에 타계하였다.

『연파집』에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시,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에 대항하다 전사한 오남(吾南) 김한섭에 대한 기사(記事), 민보군을 결성하며 발포한 창의동맹문(倡義同盟文) 등이 실려 있고, 1894년 12월 장흥과 강진성 및 강진 병영성 전투와 관련된 사실들이 담겨 있다. 또 말미에 실린 그의 행장에는 갑오년 당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보군 결성을 모의하고 준비하던 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창의동맹문(倡義同盟文)」에 따르면 김병휘 등은 ‘동도(東徒)’를 중국 한나라의 장각(長角)이나 진(晉)나라의 손은(孫恩)과 같은 무리들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창의동맹을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에 비유하기도 했다. 결국 이들은 인(仁)과 의(義)라는 유교적 덕목에 입각하여 죽음으로써 한편으로는 국가의 수치를 씻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림(儒林)의 도(道)를 지키고자 하였다.

「김오남기사(金吾南記事)」는 장흥의 농민군 접주 이방언(李芳彦)과 동문수학하는 사이였던 오남 김한섭의 민보군 활동에 대해 기록한 글이다. 김한섭은 이방언에게 <경시적도문(警示賊徒文)>을 지어 보냈으나, 이방언이 끝내 농민군 지도자의 길을 나서자 민보군을 규합하여 반농민군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오남기사」에 따르면 당시 강진 현감 이규하(李奎夏)는 그의 의기를 높이 사서 1개 면(面)의 병사를 그에게 통솔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때 김한섭 휘하의 병사들이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김한섭을 따른 것도 그가 보여준 의(義)를 추구하는 정신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12월 7일 농민군이 강진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자, 김한섭은 제자들과 민보군 및 관군을 이끌고 분전하였지만, 강진현은 농민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김한섭은 전사하였다.

김병휘의 「행장(行狀)」에는 강진성 함락 이후 농민군이 다시 진격하여 강진 병영성을 포위하자(12월 10일), 병사(兵使) 서병무는 성을 버리고 도망을 갔으나, 군기관(軍器官) 김극경(金克敬)은 화약고에 들어가서 불을 지르고 자폭하였으며, 민보군 박창현은 앞장서서 농민군 수십 명과 대적하다가 전사한 것으로 기록해두고 있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49) 동학농민혁명을 기록한 편지 4통 (48) 교도소출주장병성책, 선봉진출정장졸성명급기복마실수성책, 본진별군관차출기, 친군장위영장졸실수성책 (47)하동 방수장서목, 여산 차호규 등 첩정, 강계 외귀방 풍헌 첩정, 강계 고산방 풍헌 첩정 (46) 각 지방 동학농민군에 대한 뒤처리, 법부에 보고된 첩보류 (46) 친군통위영갑오십월일출주장졸성책, 갑오십월일친군경리청장졸성책, 갑오십월일경리청 (45) 이용목(李容穆)의 「백석서독(白石書牘)」과 이범석(李範奭)의 『확재집(確齋集)』 (44) 경각영공급기, 소지등서책, 민장초개책 (43) 오면재 통유문, 구본협 상서, 박근순 소지 (42) <오통절목> <향약장정> <향약안> <제천향약절목> (41) 〈검사직제〉〈보방조례조회통첩식〉〈전주부보고서〉〈각부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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