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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에 포함되지 않아 ‘법적 사각’에 놓인 플랫폼 노동자들
방송국은 촬영 보조·작가 등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백화점’
청년 자원 착취하는 방송국 비정규직 문제는 젠더 이슈와 밀접
노동환경 개선·고용 구조 변화를 위한 정책과 사회적 관심 필요
<더 글로리>(넷플릭스)에서 임지연이 연기한 박연진은 학교폭력 가해자로, 악랄한 인물이다. 연진은 기상 캐스터로 일하면서 부족한 실력을 남편의 재력으로 메꾼다. 후배가 이에 불만을 드러내자 연진은 권력을 과시하며 그를 위협한다. “내가 심심해서, 재미로, 네 재계약 막게 하지 마.” 이 장면은 어쩐 일인지 ‘사이다’ ‘후배 참교육’ 등이라는 코멘트를 달고 쇼트폼 영상으로 널리 퍼졌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을 동원하는 연진에 대한 불만이 여성들의 기싸움, 후배가 선배를 ‘긁는’ 행위 정도로 축소되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그동안 숱하게 나이를 자원으로 내세우는 어린 여성과 이에 위기감을 느끼는 연장자 여성을 보여주며 여성에게는 젊은 육체가 곧 경쟁력이라는 인식을 불어넣었다. 그래서 연진이 후배에게 “너 언제까지 어려?”라며 코웃음을 치는 순간, 문제의 본질을 혼동하게 된다. 이 장면의 초점은 을끼리 경쟁하도록 부추기는 노동환경, ‘재미로’ 일자리를 박탈할 수 있는 고용구조,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갈등이나 폭력을 소수의 도덕적 일탈로 치부하는 분위기에 있다. <더 글로리>는 최근 MBC 기상 캐스터 오요안나씨가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통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뒤늦게 알려지며 다시 언급되기도 했다. 그런데 고인에 대한 애도가 가해자로 추측되는 이를 지목하거나, 관련 인물을 무작위로 공격하는 것으로 표출되는 양상은 우려스럽다. 구조적 문제를 조명하기란 즉각적인 효능감을 충족하는 응징보다 느리고 지루해 보이지만, 그래서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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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은 ‘5인 이상 사업장의 근로자’에게만 적용된다. 오씨는 방송국 공채를 통해 선발되었지만 프리랜서 계약으로 일했다. 프리랜서를 포함한 플랫폼 노동자들은 일명 불안정 노동자로, 보호 대상인 근로자에 포함되지 않아 법적 사각지대에 놓인다. 방송국은 ‘비정규직 백화점’이라고 불릴 만큼 촬영 보조, 행정 업무, 작가, VJ와 같은 인력이 기간제, 도급, 파견, 프리랜서 등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으로 고용되어 있다. 방송국의 비정규직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되었으며 2021년에는 MBC에서 10년간 근속하다 해고된 작가 2명이 근로자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CJB 청주방송에서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요구하다 해고된 고 이재학 PD 또한 회사를 상대로 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최종 승소했다. 이 PD는 2020년 1심에서 패소한 뒤 억울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던 터라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2023년에는 방송국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비정규직 중심의 노동인권단체 ‘엔딩크레딧’이 출범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변화는 더디기만 하다.
아이돌이 다양한 직업을 체험해보는 웹 예능 <워크돌>(유튜브)에서 엔믹스의 오해원은 2024년 9월 <뉴스룸> 기상 캐스터에 도전했다. 기상 캐스터는 오프닝 멘트를 포함하여 대본을 직접 쓰고, 날씨와 기상특보를 확인하고, 그림을 그려서 CG를 의뢰한다. 그리고 편집이 끝난 녹화본이 나올 때까지 대기했다가, 최종 녹화본에서 틀린 정보가 없는지 확인한다. 녹화본에 오류가 있으면 바로 생방송을 진행한다. 이 작업을 하는 동안 기상 캐스터는 내내 방송국에 있으며, 방송국의 지휘와 감독을 받는다. 이름은 프리랜서지만 프리하지 않다. 그럼에도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무늬만 프리랜서’의 ‘프리’함이란 고용한 측의 자유에 가깝겠다. 방송국의 주요 업무는 비정규직 프리랜서가 맡지만, 문제가 발생하면 고용한 측은 책임지거나 개인을 보호할 의무가 없어 해고하면 끝이니 말이다. 현재 오씨의 노동자성이 주목받는 이유는, 고인이 노동자로 판정되면 산재로 인정받고 MBC의 산업안전보건법이나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수사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16년 방영한 <질투의 화신>(SBS)에서 기상 캐스터 표나리(공효진)는 자신이 걸고 있는 출입 목걸이의 줄 색깔부터 정규직과 다르다고 자조한다. <질투의 화신>은 기상 캐스터를 ‘아나운서가 되지 못한 낙오자’로 묘사해서 비판을 받았지만, 방송국 내에 또렷하게 존재하는 계급 차이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표나리가 후배와 벌이는 경쟁은 업무 성과 같은 공적 영역이 아니라 지극히 사적이고 집요한 영역에서 진행된다. 후배는 방송을 앞둔 표나리에게 일부러 술을 먹이고, 방송용 의상에 쌈장을 흘린다. 의상실에서 옷을 구하지 못했다는 후배의 거짓말 때문에 엉뚱한 옷을 빌려 입고 방송에 나간 표나리는 곤경에 빠진다. 국장과 방송국 관계자는 방송 전후로 표나리의 면전에 대고 “오늘부터 해고”라고 선언한다. 그런가 하면 윗사람들의 알력 다툼과 소통 오류로, 방송 직전까지 누가 그날의 기상예보를 진행할지 결정되지 않는 소동이 일어난다. 생방송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는데도 누구 하나 쉽사리 ‘그럼 내가 빠지겠다’며 물러서지 못한다. 한 발자국 뒤에는 ‘한 번 밀리면 끝’인 고용조건이 도사리고 있는 까닭이다.
결국 두 명의 기상 캐스터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방송에 등장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임기응변을 발휘하며 방송을 마무리한 뒤 표나리는 기절할 정도로 극도의 긴장감에 시달린다. 그런데도 이 사건은 마치 두 사람이 자기 욕심에 급급해서, 양보할 줄 몰라 벌어진 일처럼 보인다. 누군가를 짓밟아야 내가 들어갈 자리가 생기는, 개인을 쉽게 쓰고 버리는 고용 불안정성은 노동자 간 경쟁을 유발하고 정당화한다. 고전적인 학교 괴담에서 전교 2등은 늘 전교 1등을 옥상에서 밀어 떨어뜨린다. 너만 없으면 돼. 누군가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것은 구조적 모순을 직면하는 것보다 쉽고 편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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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할 수 없어. 노동자가 아니니까.” 드라마 <멜로가 체질>(JTBC)에서 방송 작가인 임진주(천우희)의 대사는 직관적이다. “노동자가 아니면?” 진주의 질문에 메인 작가는 대답한다. “자영업자.” 2024년 연애 프로그램 <나는 솔로>(ENA·SBS PLUS)에서 방송 작가들과 남규홍 PD의 분쟁이 불거졌다. 남 PD는 작가들에게 서면 계약 없이 일을 시키고, 재방송료 지급을 보장하지 않았으며, 이 문제로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되었음에도 불출석했다. 작가들은 전원 퇴사했다.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것에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고, 프로그램의 작가 기여도를 폄하하는 남 PD의 발언은 작가를 포함한 방송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받는 처우를 짐작하게 한다.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tvN)에서 윤지호(정소민)는 막내 작가로 일하며 선배에게 아이디어를 뺏기고, 입봉을 미끼 삼은 감독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결국 일을 그만두고 뛰쳐나오지만,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 때문에 은행 대출을 받는 것에도 실패하고 좌절한다. 다시, <멜로가 체질>로 잠시 돌아오자. 자영업자에게 노동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고, 노력만 있다는 메인 작가의 논리에 진주는 되묻는다. “자영업자도 노력한 만큼 버나요?” 메인 작가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 보는 듯한 얼굴로 말한다. “꿈에 가까워지는 거지.” 진주의 세계관이 드라마이자 멜로다. 진주에게 주어진 전개는 작가로서도 성장하고, 방송국에서 입지가 있는 남자를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내는 일뿐이다.
하지만 현실은? 미래의 가능성을 담보 잡고, 사랑과 열정 같은 청년의 자원을 착취하는 방송국의 비정규직 문제는 젠더 이슈와 밀접하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2020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공공부문 방송사 프리랜서 10명 중 7명은 여성(71.2%)이고 이 중 2030 여성이 75% 내외를 차지한다. 그 많던 여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또한 여성만 프리랜서로 활용되는 직무가 16개이며, 성별 임금·직무 분리가 확인된다. 여성 다수의 직무인 리포터, 캐스터에 비해 남성 다수인 조명, 편성 등의 직무가 두 배 이상의 보수를 받는다. 여성 캐스터나 리포터는 젊고 아름다운 육체가 중요시되고, 그래서 더 빨리 교체되며, 전문성이 부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적은 임금과 부당한 대우가 당연시되고, 교체가 빠르기에 지속적인 문제제기가 정치적 응집력을 갖추기 어렵다. 스타 PD는 언제나 남성이되,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역할인 방송 작가는 여초 직군으로서 그 공로와 역량이 지워진다. 방송 제작 및 지원과 같은 노동이 오랫동안 비공식화된,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취급받으면서 경제적 보상과 법적 보호로부터 배제된 것에는 여성화된 노동이라는 특수성도 작동했던 것이다. 원론적인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노동환경 개선과 고용구조의 변화를 위한 정책과 사회적 관심을 요구한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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