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2024-12-27

우리의 삶이라는 여정에서 큰 변화를 겪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는 이를 운명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신의 섭리라 할 것이다.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라고 믿는 사람도 많다.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힘은 과연 무엇일까.

우디 알렌 감독의 영화 ‘매치 포인트’는 그것이 우연이라고 말한다. 매치 포인트는 테니스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마지막 한 포인트이다. 영화에서 공이 네트 위를 맞추는 순간, 내레이션이 흐른다. “사람들은 삶의 대부분이 운에 좌우된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시합에서 공이 네트를 건드릴 때, 공은 넘어갈 수도 그냥 떨어질 수도 있다. 운이 좋다면 공은 넘어가고 당신은 이긴다. 반대의 경우 패배한다.” 가난한 전직 프로테니스 선수 크리스는 부유층 여성과의 결혼으로 꿈꾸던 영국 상류사회에 진입하지만, 위험한 욕망에 이끌려 살인을 저지른다.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서 기막힌 우연은 그를 위기에서 구해준다.

삶에서 우연으로 큰 변화 많이 발생

1차 대전 등 세계사에도 큰 영향

우크라 국민들은 잔인한 불운 경험

최선 다할때 역경 이겨낼 수 있어

인생은 그런 우연의 연속이다. 스위스의 철학교수인 파스칼 메르시어가 우연한 사건이 삶을 바꾸어 버린 일을 소재로 하여 쓴 소설이 『리스본행 야간열차』다.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과 자비심과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The real director of life is accident-director full of cruelty, compassion and bewitching charm).” 나를 사로잡은 것은 간결한 이 문장이었다.

나는 우연이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바꾼 것을 많이 보았다. 아프리카 험지에 지원했다가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난 외교관도 있다. 파키스탄 메리어트호텔 식당에 10분 늦게 도착한 덕분에 가족이 구사일생으로 폭탄테러를 피한 후,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 사표를 낸 외교관도 있다. 그는 평소 꿈꾸던 우동명가의 사장이 되었다.

우연은 세계사도 바꾸었다. 1차 대전은 1914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제국 황태자 부부의 암살로 시작되었다. 암살단 ‘검은 손’의 첫 번째 암살시도가 실패한 후 황태자 부부의 일정은 변경됐지만, 운전기사들에게 이를 알려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는 권총을 든 세르비아 청년이 기다리고 있던 길로 간 것이다. 1453년 투르크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에서는 메흐메트 2세가 투르크 배 수백 척을 산을 넘어 내항으로 옮기는 천재성을 발휘하기도 했으나, 콘스탄티노플 측 누군가가 성벽의 쪽문(케르카포르타)을 실수로 열어둔 바람에 투르크군의 급습을 받아 무너졌다.

우연은 전쟁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코미디언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 드라마 ‘국민의 종복’에서 부패와 싸우다가 국민적 명성을 얻어 대통령이 되는 역할을 맡았다가, 현실에서도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우연은 행운으로만 오지는 않는다. 하필 자신의 임기에서 러시아의 침공으로 국민을 전쟁터 사지로 내보내야 하는 불운을 겪었다. 푸틴의 침공은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일부’라는 잘못된 역사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에겐 필연적인 사건이겠으나, 갑자기 전쟁이란 날벼락을 맞은 우크라 국민에게는 잔인한 불운이었다. 우연히 러시아 미사일을 피한 주택가의 사람들은 살아남고, 길을 가다 갑자기 날아든 총알에 맞은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다.

산속 깊은 곳에서 시작된 하나의 작은 물줄기가 어떤 지점에서 여러 물줄기로 갈라져 완전히 다른 길로 가게 되듯이, 우연은 그 자체의 불가피한 궤적을 만들어 내며 우리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는다. 그것은 어느 봄날 우리의 삶에 갑자기 들어온 누군가일 수도 있고, 소중한 사람과의 예기치 않은 작별일 수도 있으며, 불의의 사고일 수도 있다.

우연이 불운으로 찾아와 삶을 뒤흔들어 놓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허무주의에 빠져 낙담한 채 살아야 할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불운 그 자체가 아니라, 불운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다. 전쟁에 필요한 자원에서 러시아에 절대적 열세지만, 우크라이나는 지금껏 버텨왔다. 불운에 굴복하지 않고 자유를 위해 싸워온 그들의 항전 의지는 언젠가 그들의 조국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그러나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삶이라는 거친 항해에서 우연이 잔인함을 드러낼 때도 우리는 무너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할 일은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이며 불운에 맞서 이겨내는 것이다.

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한국수입협회 상근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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