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의 속죄

2025-08-27

오늘날 가장 주목받는 테크기업 엔비디아의 초창기에는 여성 직원이 거의 없었다. 수석과학자를 지낸 데이비드 커크의 회고에 따르면 1999년 당시 딱 3명이었다고 한다. 관련 전공자에 여성이 적은 이유도 있었다. 미국공학교육협회 2023년 보고서를 보면 전기·전자공학 전공자 중 여성 비율은 14.6%로 공학 분야 중 꼴찌다.

최고경영자인 젠슨 황은 여성 직원을 늘리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2024년에 엔비디아 전체 직원 중 여성은 4분의 1을 넘어섰다. 여성 직원이 늘면서 한때 엔비디아를 상징했던 성적인 이미지의 요정 ‘던(Dawn)’도 2020년 무렵에는 마케팅 자료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최근 출간된 젠슨 황의 공식 전기 <엔비디아 젠슨 황, 생각하는 기계>에 나오는 일화다. 젠슨은 왜 여성 직원을 늘리라고 지시했을까. 전기의 저자인 ‘뉴요커’ 출신 기자 스티븐 위트는 젠슨이 아내 로리 밀스에게 미안함을 느껴 속죄하려는 마음으로 그랬을 거라 추측한다.

젠슨 황은 오리건주립대 전기공학과 신입생 시절 같은 과 학생인 로리를 만났다. 250명 학생 중 여학생은 로리를 비롯해 3명뿐이었다. 로리 역시 뛰어난 엔지니어였다. 졸업 후 유망 기업이었던 실리콘그래픽스에 입사했고 결혼 후에도 일을 계속했다. 젠슨이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 회사에 다닐 때 동료로 만나 오랜 친구가 된 옌스 호르스트만도 젊은 시절 로리의 뛰어난 재능을 기억했다. 그는 반도체 칩 오작동 문제에 대해 로리와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다. 대화는 입자물리학 지식까지 넘나들었다. 옌스는 로리가 “사고방식이 깊고, 구조적이었다”고 회상했다.

젠슨 황이 엔비디아를 창업하면서 로리는 일을 그만둬야 했다. 태어난 지 2~3년밖에 안 된 아들과 딸을 돌볼 사람이 없었다. 믿을 만한 보육시설을 찾지 못하자 로리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들을 키웠다. 로리뿐 아니라 옌스의 아내도, 젠슨과 엔비디아를 공동 창업한 크리스 말라초스키의 아내도 엔지니어였지만 마찬가지로 일을 그만뒀다. 옌스는 “이 일에 나 자신을 쏟아부을 수 있는 자유를 누렸다는 점에서 가끔 가족에게 죄책감을 느낀다”며 “우리가 더 노력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아내에게 일을 그만둬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젠슨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한국의 여성 경력단절은 미국보다 더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유일하게 여성의 연령별 취업률 그래프가 ‘M’자 모양을 띠고 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30대가 되면 많은 여성이 일을 그만둬서 취업률이 뚝 떨어진다는 얘기다. 저출생의 핵심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고위직에서 여성을 찾기는 더욱더 어렵다. 데이터저널리즘팀이 노무현 정부부터 윤석열 정부까지 내각과 대통령실 수석비서관급 이상 명단을 분석해보니 모두 455명의 인물 중 여성은 49명에 불과했다. 10.8%로 10명 중 1명꼴이다. 그래프를 그려보니, 그나마도 여성가족부나 환경부 같은 부처를 제외하고 여성의 존재는 텅 비었다. 갈수록 여성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공직 진출이 활발해졌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17.2%로 높아졌던 걸 제외하면 제자리걸음이었다.

2000년 ‘행정고시’로 불리는 5급 공채 공무원 시험에서 여성 비율이 25.1%를 차지해 ‘여성파워’가 돋보인다는 보도가 나온 지 25년이 됐다. 여성 합격자 비율은 이후에도 더 늘어 꾸준히 40% 안팎을 유지했다. 2016년 인사혁신처는 고위공무원이 되는 데 임용 후 보통 21년6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그러나 2024년 현재 고위공무원단 1554명 중 201명(12.9%)만이 여성이다.

민간 부문은 더하다. 지난해 삼일PwC 거버넌스센터 보고서를 보면, 자산 5000억원 이상 상장사 중 이사회에 여성이 없는 회사가 50%였다. 전체 이사 중 여성 비율은 10% 정도였고, 그나마도 경영진에 속하는 사내이사로 한정하면 4%에 불과했다.

엔비디아는 경영진 6명 중 2명이 여성이고, 이사회 멤버 12명 중 4명이 여성이다. 젠슨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자유로운 재택근무 정책을 유지하겠다고 하면서 말했다. “이 놀라운 화상회의 기술을 활용해 젊은이들, 특히 젊은 여성들이 인생을 설계하고, 가정을 이루고, 동시에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나는 이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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