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뮤지컬 창작 60년
〈먼저 보실 글〉
⓵ 北 ‘피바다가극단’ 맞서라? 3공 ‘뮤지컬 기동대’ 전설
⓶ 윤복희 뮤지컬 본 영국인 “한국인 다 도둑놈입니까!”
⓷ 극단 관두고 롯데월드 갔다… ‘건달’로 출세한 남경주 비결
⓸ 극장 벽까지 뜯은 100억 ‘유령’… “사치” 쏟아진 욕, 노림수였다
설도윤(현 에스앤코 예술총감독) 대표가 ‘오페라의 유령’을 하면 전 ‘맘마미아’ 하고, 그쪽이 ‘캣츠’를 하면 여기선 ‘아이다’ 하는 식으로 뉴욕이나 런던에서 가장 핫한 대작들을 경쟁적으로 올리면서 우리나라 스태프·배우들 기량이 짧은 기간에 급성장했죠. 뮤지컬 전문 프로듀서 1세대라 할 두 사람이 선진형 훈련 도입에 일등공신이었다고 자부합니다.

이렇게 자신있게 말하는 남자, 신시컴퍼니의 박명성(62) 예술감독이다. 해외에선 ‘프로듀서 박’으로 통한다. 1982년 극단 동인극장에서 배우로서 첫발을 뗀 이래 43년. 그야말로 무대에 인생의 전부를 걸었다. 2018년 신시컴퍼니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그가 낸 책 『드림 프로듀서』(북하우스)엔 영광과 오욕으로 얼룩졌던 ‘무대 뒤 인생’ 이야기가 질펀한데, 그중 1999년 ‘갬블러’ 재공연 실패로 7억원의 손실을 입은 뒤 에피소드가 절절하다.
전세금을 빼서 급한 돈을 지불한 뒤 신용카드마저 정지된 상태에서 도망치듯 뉴욕 연수 길에 오른다. 결혼한 지 2년 된 아내가 배 속 둘째를 유산한 직후였다.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지원하는 연수를 가지 않으면 이미 받은 연수비를 반납해야 할 처지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전 재산 5000달러로 6개월 하숙비를 치르고 매일 싼 티켓으로 브로드웨이 극장을 기웃대다 보니 두 달 만에 수중엔 8달러가 남았다. 몸살 기운까지 겹쳐 방구석에서 울면서 자책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자만심에 들떴던 것일까. 왜 좀 더 신중하지 못했을까.’
‘아내와 아이(첫째)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신시에서 전화가 왔다. “이제 신용카드 쓰세요! 표 팔린 돈으로 대금 결제했어요.”
그가 없는 사이 허준호가 주연한 ‘사운드 오브 뮤직’이 히트한 덕에 급한 불이 해결됐다는 소식이었다. “생각하면 미쳐버릴 것 같아 외면하고 있었던 나의 가족, 뭘 먹고사는지도 모른 척했는데 전화 한 통 할 수 있었다. 몸살도 씻은 듯 나았다. 신시 멤버들이 고마워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오뚝이처럼 일어선 그가 뉴욕에서 가져온 게 ‘뮤지컬 제작 선진 시스템’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선 공연 3개월 전에 주먹구구식으로 ‘헤쳐모여’를 반복하며 연습했는데, 브로드웨이에서 지켜본 제작 관행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오디션’이란 개념 또한 생소한 것이었다. “우물 안에서 큰소리치던 개구리가 호수를 보고 입이 떡 벌어진 느낌”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얼마 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외벽에 아리송한 현수막이 걸렸다. 앞뒤 설명 없이 한 글자 ‘Rent’. 영어로 ‘임대’라는 뜻이다. 문의전화가 잇따랐다. “예술의전당 내놓았나요? 건물 몇층을 임대합니까?” 이렇게 폭풍이 시작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