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171〉6공화국 마지막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2025-09-09

기술대학 설립·공무원 과기 전공자 우대 제안 ‘유종의 미’

1993년 새해가 밝았다. 새 정부 출범을 50여일 앞두고 노태우 정부는 연초부터 바쁘게 돌아갔다. 1월 14일 정부는 각 부처의 새해 업무계획 보고를 대면에서 서면으로 받기로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국정평가보고회에서 “새 정부의 원활한 출범을 뒷받침하고 국정 마무리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각 부처의 올해 업무보고는 서면으로 하라”고 지시했다.

경제기획원을 비롯한 각 부처는 이에 따라 19일부터 '1993년도 업무계획'을 서면으로 청와대에 보고했다.

과학기술처는 21일 업무보고를 했다. 과학기술처는 서면 보고에서 “올해 'G-7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기술개발복권을 발행하는 등 2000년대 과학기술 선진 7개국권 진입을 위한 기틀 마련에 역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과학기술처는 “올해 총 4051억원을 11개 G-7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원자력 핵심 기술과 농업·환경·에너지 기술개발사업 등을 적극 추진해 나가겠다”고 보고했다.

또 상반기 중에 기술개발복권 550억원을 발행하는 등 한국종합기술금융주식회사의 기술개발자금 지원 규모를 4000억원으로 늘려 이의 90%를 중소기업에 집중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과학기술 인력 확보 방안으로 기존 자연계 대학(대학원)의 첨단기술 분야 정원을 1995년까지 학사과정은 매년 4000명, 석·박사과정은 2500명씩 증원하기로 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정원도 1992년 1860명에서 1996년 3300명으로 늘리기도 했다.

1995년 3월 개교 예정인 광주과학기술원(GIST) 건설사업은 총 121억원을 들여 3월 중 기공식을 갖고 교수 확보, 첨단교육기자재 도입 등을 단계적으로 추진키로 했다.

과학기술처는 특히 연구개발사업을 뒷받침하기 위한 방안으로 1996년까지 1조원 규모의 과학기술진흥기금 조성, 정부투자기관의 기술개발 투자 확대 권고, 민간기업에 대한 조세·금융·구매 등 지원제도를 강화하기로 했다.

과학기술처는 1992년 12월 관계부처 공동으로 수립한 '정보산업육성전략계획' 가운데 소프트웨어에 대한 세부 추진계획을 마련해서 올해 안에 시행하고 한국과 일본 과학기술협력 도쿄사무소, 한국과 러시아 과학기술협력센터 등 운용을 내실화해 이들의 정보수집 기능을 크게 강화하기로 했다.

1993년 2월 2일 오전 11시 노태우 대통령은 청와대 집현실에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주재했다. 노 대통령 임기 중 마지막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였다.

자문회의는 1991년 5월 31일 상설기구로 발족해 활동해 왔다. 지난 2년 동안 자문회의는 과학기술투자 확대 등 9개 과제별 소위원회 구성, 기술진흥기금 설치, 과학기술세 신설 등 정부 부처 벽을 뛰어넘어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처방을 대통령에게 제안했다.

이날 회의에는 김성진 위원장을 비롯해 최형섭(전 과학기술처 장관)·조순(전 경제부총리)·박규태(연세대 교수)·이은철(서울대 교수)·김영식(서울대 교수) 등 자문위원, 간사인 김진현 과학기술처 장관, 최각규 경제부총리, 조완규 교육부 장관, 김호기 자문회의 사무처장이 참석했다. 청와대에서는 정해창 대통령 비서실장과 이진설 경제수석비서관 등이 배석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날 보고를 받고 “과학기술 인력 육성의 국가적 중요성에 비추어 별도 법안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다음 정부에서 '산업기술교육법'을 제정할 수 있도록 업무 인계를 잘하라”고 지시했다.

노 대통령은 전문 분야별 기술대학 설립이 필요하다는 자문회의의 건의에 대해 “기술대학 제도는 고교졸업생에게 진학의 문을 열어 주고 산업현장 인력에게 더 배울 기회를 부여해서 수준 높은 산업인력 확보를 가능하게 하는 좋은 방안”이라고 평가했다.

노 대통령은 대학입시에 과학 과목을 보강하고 중등 과학교육 등 교육제도를 대폭 개편해야 한다는 보고 내용에 대해 “잘 검토해서 장점을 최대한 수용토록 조치하라”고 지시했다.

노 대통령은 또 “대전 엑스포가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높이고 과학기술을 생활화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도록 관계부처가 대책을 마련해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노 대통령은 “현재 교육제도로는 훌륭한 과학두뇌와 산업기술 인력 양성·확보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면서 “차기 대통령이 대통령 직속으로 교육개혁위원회 설치를 공약한 것은 반가운 일”이라고 말했다.

김성진 위원장은 이날 그동안 소위원회와 각계 전문가의 연구·검토를 거쳐 마련한 대학입시제도 혁신, 기술대학 설립,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의식 제고, 공직자의 과학기술 소양 증진 등 네 가지 방안을 보고했다.

김성진 위원장은 “대학입시제도와 중등 과학교육의 장기대책으로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회'를 설치해 대입제도의 근원적인 개혁을 도모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단기 개선 방안으로는 1994학년도 대학수리능력시험 가운데 수리·탐구 영역에서 탐구 분야를 분리해 비중을 높이고, 과학적 탐구 과정과 결과를 함께 묻는 '2단계 오지선다형' 방법을 도입해 객관식 시험의 단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또 모든 과학기술계 대학의 대학별 고사에서 수학·물리·화학 등 과학 과목 시험을 주관식으로 실시하고, 수학·물리·화학·정보과학 등 전국과 국제 규모 경연대회 입상자의 과학기술계대학 진학 시 특전을 부여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우수 산업기술 인력 확보를 위한 기술교육제도 개편 방안으로 공업계 고등학교 졸업자와 산업 현장 인력을 대상으로 한 '전자 기술대학' '자동차 기술대학' 등과 같은 전문분야별 기술대학 설립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현재 전체 고교생의 9% 수준인 공업계 고교의 학생 수를 25%까지 늘리고 장학제도 확충, 병역특례 확대 등 우수학생 유치와 교육 여건 개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공업계 전문대학의 기술교육 효율을 높이기 위해 앞으로 신설되는 공업전문 대학은 기술 분야별로 특성화해서 육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의식을 높이기 위한 대책으로 신문·방송 등 대중매체를 통해 과학기술 관련 내용을 꾸준히 소개하고 '1994년 과학교육의 해'를 맞아 과학교육자 대회, 과학교육 공로자 포상, 과학교육 기금 모금 등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할 것을 건의했다.

김 위원장은 “전문화·정보화하는 행정 추세에 따라 공직자의 과학기술 소양 증진 방안으로 모든 공무원 임용시험에서 '현대사회의 과학기술' '첨단기술' 등 과목 가운데 하나를 필수적으로 선택하도록 하고, 일반직 공무원의 임용시험에서 과학 기술 분야 전공자를 우대하는 조치를 시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공무원의 재교육에 과학기술 분야 포함 과학기술에 대한 기초 소양을 갖추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보고 후 자문위원들과 오찬을 함께하며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 자리에서 박규태 위원은 “산업기술교육법을 제정해 전문 분야별로 기술대학을 설립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최형섭 의원은 학문 숭상 기풍 진작을 언급하며 “조선의 선비정신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해창 대통령 비서실장의 증언.

“이날 오찬에서는 다양한 내용의 대화가 오갔다. 화기애애한 오찬이었다. 대통령께서 과학인력 양성의 중요성과 함께 대전 엑스포가 과학기술진흥에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달라는 당부 말씀을 하셨다.”(대통령 비서실장 791)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이에 앞서 1992년 12월 11일 오후 서울대 호암관에서 김성진 위원장 주재로 안건 상정과 자문과제 등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는 자문위원 10명과 전문위원 5명, 사무처 관계자 9명 등 모두 25명이 참석했다. 회의는 오후 4시부터 8시 30분까지 30분 동안 계속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오찬이 끝난 후 거듭 자문위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자문위원들과 본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6공화국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세월의 물결 속에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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