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의 거인과 사무라이, 그 사이 한국

2025-10-23

미국은 지금 ‘갱년기 증상’에 시달리는 거인이다. 한때는 지구를 주름잡던 초강대국이었지만, 지금은 허리가 뻣뻣하고 숨이 차오르는 중년의 몸처럼 여기저기서 삐걱거린다.

그 거인은 본토 방위와 이민자 단속이라는 ‘집안일’에 천문학적 예산과 군대를 쏟아붓느라 정작 바깥세상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다. 그 사이 핵심 전력인 주방위군은 인도·태평양에서 중국을 견제할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고 있다.

올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국경 방어’를 명분으로 최대 1만명에 이르는 병력을 투입했다. 멕시코 국경선, 태평양 연안, 주요 도시 곳곳에 7600명의 현역 군인이 흩어져 있고, 여기에 수천명의 주방위군까지 합치면 이민자 단속에 투입된 병력이 수만명에 달한다.

문제는 돈이다. 무려 1700억달러, 한화로 230조원이라는 천문학적 비용이 여기에 들어간다. 구금시설 확충, 장벽 건설, 감시 기술, 추방 작전… 모든 게 ‘내부 단속’에 소모되는 가운데, 정작 인도·태평양으로 향해야 할 전략적 자원은 고갈돼 간다.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국경순찰대(Border Patrol)만 해도 각각 750억달러씩 배정받아 체포와 구금 작전을 벌이는 중이다. 미국이 ‘내 코가 석 자’라며 국경에 몰두하는 동안, 인도·태평양 전략은 조금씩 삐걱대고 있다. 의회와 언론이 ‘군사적 준비 태세의 저하’라며 경고음을 울리는 이유다. 미국이 국방부 명칭을 ‘전쟁부’로 바꾸기는 했지만, 그 전쟁은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로 향하고 있다. 이러다가 미국이 중국·러시아와의 ‘강대국 경쟁’에서 이탈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미국 내부로부터도 나오고 있다.

이 공백을 노리고 움직이는 이가 있다. 바로 일본이다. 새로 출범한 일본의 자민당·유신회 연립정부는 미국의 ‘갱년기’를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있다. 일본은 안보 정책의 전면 개편을 선언했다. 3대 안보 문서 조기 개정, 토마호크 미사일 도입, 차세대 지대함 미사일 개발, 원자력 추진 잠수함 확보 계획까지 내놓으며 ‘전후의 족쇄’를 스스로 끊고 있다. 특히 핵 추진 잠수함 계획은 일본이 ‘강대국으로의 복귀’를 노골적으로 선언한 것과 다르지 않다. 선제공격 능력을 갖춘 일본은 아시아의 지도국이 되겠다는 야망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러나 일본 역시 쉬운 길을 걷는 것은 아니다. 인구 급감, 헌법 개정의 난제, 국제사회 신뢰 부족 등 ‘내외부의 갱년기’ 증상은 국정 곳곳에서 드러난다. 사무라이의 칼날은 번뜩이지만 그 손목은 떨리는 형국이다. 일본이 제1열도선에서 중국과 대치하는 선명한 세력권을 구축할 역량을 갖추기에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거인’과 ‘사무라이’ 진영 속에 포함된 한국이 갈 길은 무엇인가. 우리도 덩달아 근육을 늘리는 군비경쟁에 뛰어들 것인가. 더 중요한 일이 있다. 바로 균형자의 길, 즉 감정이 아닌 전략, 종속이 아닌 자율, 진영이 아닌 실리다.

이런 길을 걸어 세계정치의 격랑을 버텨낸 나라들이 있다. 스위스는 19세기 이후 어떤 동맹에도 가담하지 않고도 국가 안보를 지켜냈다. 단순히 ‘중립’을 선언해서가 아니다. 강력한 자위력과 정밀한 외교, 그리고 금융과 국제중재라는 실리를 통해 강대국의 이해를 절묘하게 조정했다. 핀란드는 냉전기 소련과 서방의 경계선에 서 있었다. 그러나 소련과 충돌을 피하면서도 서방과의 경제 협력을 강화해 국가 주권을 지켜냈다. 이른바 ‘핀란디제이션’이다. 중립과 자율의 경계에서 핀란드는 강대국의 전장이 아닌 완충지대이자 실용국가로 기능했다. 싱가포르는 군사력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실용주의 외교로 강대국의 교차점에 서 있다. 미국·중국·아세안(ASEAN)·유럽연합(EU)과 다층적 관계를 맺으며, 경제력을 안보의 대체재로 삼았다. 감정이 아닌 계산, 이념이 아닌 실리가 싱가포르 외교의 정수라 할 것이다.

한국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미·중 전략경쟁의 한가운데 서 있다. 그러나 선택은 단순하지 않다. 어느 한쪽의 편에 서는 것은 가장 쉬운 길이지만, 가장 위험한 길이기도 하다. 우리는 새로운 생존 공간을 찾아야 한다. 다시 현실주의가 귀환하는 주변 정세에서 ‘수동적 중립’이 아니라 ‘능동적 균형자’로 서는 것, 이것이 진짜 전략이다.

다가올 202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경주)는 이 전략을 시험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미국의 갱년기와 일본의 야망 사이에서 이제는 한국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할 말은 제대로 하며” “주변 정세를 조정하는” 줏대 있는 나라의 품격을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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