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8 민주화운동 당시 강압 수사를 받다가 숨진 임기윤 목사에 대한 2심 재판에서도 “국가가 2억1000만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법원은 임 목사의 유족들에게는 손해배상 청구권이 없다고 했다. 유족 측은 “5·18 학살 피해자 유족들의 배상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는 판결이 계속 나오고 있다”며 대법원 판단을 받겠다고 했다.
16일 경향신문 취재에 따르면 서울고법 민사 12-3부(재판장 김용석)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보안사에서 조사를 받다 숨진 임기윤 목사에게 국가가 2억1000만 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한 원심에 문제가 없다고 지난 9일 판결했다. 2심과 1심 재판부는 모두 “국가의 위법행위로 고인과 가족들이 정신적 고통을 당했으므로 2억1000만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임 목사는 민주화운동을 전후로 광주 외의 지역에서 신군부의 만행을 비판하다 희생당한 ‘광주 밖 희생자’다. 임 목사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독재 및 전두환 정부 당시 신군부의 광주 학살을 비판하는 강연회 등을 열다가 1980년 7월19일 계엄합동수사단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고혈압 증세가 있던 임 목사는 조사 과정에서 수사당국의 모욕적인 언사 등으로 순간적으로 뇌출혈이 일어나 쓰러졌고, 조사 8일째인 같은 달 26일 사망했다. 유가족은 2023년 5월 국가를 상대로 60억원 손해배상소송을 냈다.
1심은 임 목사의 피해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해 유족들에게 상속분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유족들에게는 손해배상 청구권이 없다고 판단했다. 민법상 청구권의 소멸시효인 3년이 지났다고 봤기 때문이다. 법원은 임 목사가 1998년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에서 5·18민주유공자로 인정받았을 때 유족들도 이미 국가의 불법행위를 인지했다고 보고, 소송을 낸 2023년에는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판단했다. 유족 측은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유족 측은 2심 재판에서 임 목사가 보상금을 받은 1998년을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군사정권의 ‘긴급조치’나 ‘비상계엄’ 등으로 고통을 겪은 이들에 대한 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례 등이 없었기 때문에 청구권을 행사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유족 측은 2022년 8월 대법원이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에는 정부의 배상 책임이 없다’는 판례를 뒤집고 “박정희 정권 때 발령된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해 옥살이를 한 피해자들에 대해 국가가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단한 때를 기준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족들의 배상청구권은 이때부터 실질적으로 인정됐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하면 손해배상 소송을 낸 2023년 5월에도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게 유족 측의 주장이다.
재판부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유족들의 청구권 소멸시효는 늦어도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보상금 지금 결정을 받은 날(1998년 4월29일) 또는 보상금을 신청한 날로부터 진행된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 밖에도 유족 측은 “고인의 위자료만 인정하고 유족들의 청구권만 소멸됐다고 보는 건 평등권에 위배된다”는 점 등을 주장했지만 인정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고인의 위자료 청구권과 가족들의 위자료 청구권은 법적으로 별개의 권리”라며 “소멸 시효의 시점을 달리 판단하는 것이 평등권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임 목사의 유족들은 2심 판단에 불복해 상고할 예정이다. 유족을 대리한 이상희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는 “국가의 긴급조치권이나 비상계엄으로 인한 피해자들이 2022년 대법원판결이 나온 뒤에야 비로소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판결”이라면서 “비상계엄이나 긴급조치로 인한 피해는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 전체를 파괴하는 일인데도 유족에게 차별적인 판결이 계속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