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판사에게 멱살 잡힐 글” 썼다는 변호사

2025-04-17

현실과 유리된 사법부의 모습과

그에 분노한 소시민 다룬 단편들

추리소설 쓰는 판사 출신 변호사

“법정·인간 보며 느낀 것 작품화”

“이 법정에서 가장 무심한 사람은 판사였다. 그는 온갖 감정이 교차하는 눈앞의 광경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듯, 손에 든 종이 몇장에 시선을 고정하고 마치 읊조리듯 판결을 읽어 나갔다.”

도진기 작가의 단편집 <법의 체면>의 표제작에서 묘사하는 법정의 모습은 이렇듯 무미건조하다. 교통사고로 피해자에게 전치 14주의 상해, 실제로는 식물인간 수준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피해를 입힌 피고인에게 판사는 집행유예 처분을 내린다. 이에 항의하는 피해자 가족의 절규에 판사는 “법대로 했습니다! 돌아가세요!”라고 말한다. 판사는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 이보다 법정의 질서를 어긴 이에게 더 엄격한 듯 보인다. 이어 변호사 사무실을 찾은 한 노인의 모습이 등장한다. 금은방을 하는 노인은 장물을 거래한 혐의로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2심까지 유죄가 인정됐으나 대법원의 판단을 받고 싶다고 한다. 변호사는 노인의 말을 무시하려 하지만, 노인이 자신은 폐암 4기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그저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고 싶다고 말한다.

“저한테 법이란 건 늘 ‘거절한다’는 기억”이었다며 자신을 도와달라는 노인을 보고 변호사는 마음이 움직인다. 변호사로서 사람을 많이 만나봤지만, 노인은 범죄와는 무관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법의 판단을 바꾸기는 어렵다. 대법원에서도 노인은 유죄 판결을 받는다.

반전은 이후 일어난다. 사실 노인은 과거 사법부 판단에 억울함을 느끼고 장물 사건에 의도적으로 개입한 것이었다. 노인의 트릭에 걸려들어 함정에 빠진 사법부의 모습을 통해 책은 무엇이 정의인지 질문한다. 노인은 일갈한다. “법은 진실이 무엇인지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들에게는 법의 체면이 더 중요했던 겁니다.”

법의 체면

도진기 지음

황금가지 | 396쪽 | 1만1900원

표제작을 포함해 6편의 작품이 실렸다. 단편 ‘완전범죄’는 판결을 내리는 법관들의 주관적 의견에 따라 유무죄가 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를 메시지로 던지는 작품으로 사법 시스템에 대한 우려 섞인 조언을 담았다. ‘당신의 천국’은 어느 날 국회의원에게 자신의 살인죄를 고백하며 찾아온 여성의 이야기를, ‘애니’는 가상 꿈 실험에 참여해 이상형의 여자를 만난 남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사회 정서와 유리된 법원 결정과 그에 대한 소시민의 분노와 좌절을 그린 소설이 20년간 판사로 재직하다 지금은 변호사로도 활동하는 작가의 손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소설의 묘사가 그저 허구라는 생각이 쉽게 들지 않는다.

실제 지난해 12월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이 벌인 비상계엄 사태 이후 사법부는 근 몇 개월간 전 국민의 관심 대상이었다. 헌법재판관 임명, 윤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 및 탄핵 등 굵직한 사건을 거치며 시민들은 법에 분노하기도 하고 환호하기도 했다. 때때로 실망도 안겨줬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지명한 함상훈 헌법재판관 후보자는 과거 2400원을 횡령한 버스기사의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는 것이 알려지며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해당 사건은 2014년 한 버스기사가 승객 4명으로부터 받은 승차요금 4만6400원 중 2400원을 회사에 내지 않았다며 회사로부터 횡령으로 해고당하면서 벌어졌다. 20년간 그 회사에서 일한 운전기사는 단순 실수로 인해 해고당한 것은 과도하다며 해고무효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운전기사의 손을 들어줬으나 당시 함 후보자가 있던 항소심 재판부는 “횡령액이 소액이더라도 사회 통념상 고용 관계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책임 있는 사유에 해당한다”며 회사의 해고를 인정했다. 대법원은 이 판결을 확정했다.

2400원, 커피전문점 아메리카노 한 잔 가격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 때문에 해고됐다는 것에 일반적인 사회의 반응은 ‘너무하다’였지만, 법의 체면은 이를 용서할 수 없는 범죄로 본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법정과 인간을 여러 시선으로 보면서 느꼈던 바를 작품화한 것”이라며 “솔직히 말하면 실망이나 안타까움을 느낀 때가 계기였다. …써 놓고 보니 판사들한테 멱살 잡힐 글인데, 제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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