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작일지] 영화 <반구대 사피엔스>, 다큐멘터리 <반구대별곡> “ (29) 인내심 고갈”

2025-04-17

황희 정승 수염 잡아당긴 노비 자식들은 어떻게 자랐을까?

내가 역사도 문외한이고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도 문외한이다마는 어린 노비들이 황희 정승 수염을 잡아당겨도 허허 웃었다는 일화와 검은 소, 누렁소 일화는 안다. 삐딱해서 그런지 상상력인지 통찰력인지 모르겠지만 난 두 가지 지점에서 역사란 왜곡의 절정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황희는 권력을 쥐었으니 미화됐을 거란 말이다. 천수만수 누릴 때까지의 권력이란 표독한 인간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걸 사회생활 해보니 깨달은 것이랄까.

이성계에게 투항하기 싫어서 ‘두문’에 숨어버린 모든 가족이 다 불에 타 ‘두문불출’했는데 황희는 20년 가까이 정승 생활을 했다. 그것도 정승의 ‘대가리’ 영의정만. 모신 왕만 다섯이라나. ‘입바른 소리’ 덕분에 귀양도 여러 번 갔다고 하지만 글쎄다. 명분과 모양새가 중했던 시절이라 해도 독 품은 구렁이 수 마리를 품지 않았다면 단언하건대 턱도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왜 그런 인사가 ‘감히’ 노비 자식들이 수염을 잡아당기는데도 너그럽게 웃었다고 했을까? 스토리텔링‘적’으로 상상해 본다면 그 어린 것들은 언제든 흔적 없이 없애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그때가 완전범죄를 저지른 직후였을지도. 아니. 이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검은 소, 누렁소 이야기처럼. 신화적인 ‘바이럴 마케팅’이 먹히던 시절 아닌가.

그럼 두 번째. 수염 잡아당긴 아이들에게 황희가 너털웃음 터트린 것이 사실이라면 그 애들은 어떻게 자랐을까? 이야! 정말 훌륭한 높은 양반 할아버지다! 할아버지의 높으신 은혜, 대단히 땡큐! 그래서 그의 모습을 닮으려 노력했을까, 아니면 양반을 우습게 보곤 제 할 일은 하지 않으며 끝없이 ‘우쭈쭈’ 해 주기만을 바라는 놈팡이가 됐을까? 이게 아니면, 노비인 부모에게 죽도록 맞아서, 또는 아이와 부모 되는 노비들이 다른 양반에게 얻어터져서 양반을 두려워하게 됐을까, 아니면 양반에게 적개심을 가졌을까?

어느 쪽이 되든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간에게 계급을 만들었다는 자체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든 저러든 제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누리려고만 하는 건 싫고, 무능하면서 노력하지 않는 건 거북스러우며, 부끄러움을 모르고 앉은 자리에서 다른 생각만 하는 건 혐오스럽다.

아. 나는 황희도 수염 잡아당기는 어린 노비도 되지 말아야지.

부화뇌동의 죄는 다시 원점으로, 벌은 원점보다 더 뒤로

원래는 <반구대 사피엔스>를 유쾌한 네오리얼리즘 방식으로 제작하려 했었다. 처음 시작할 때 언제나 흥하고 망했던 때를 잊지 말자고 되뇌었는데 또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보기 좋고 듣기 좋으며 코끝이 달큼하고 혀끝이 사르르 녹는 맛에 원래 내 자리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밑천도 없는 주제에 일을 너무 크게 벌였다. 지갑과 호주머니가 찢어진 줄도 모르고 여기저기 줄줄 흘리고 다녔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무척 좋아한다. 한 번 본 영화 두 번 보기 어렵고 한 번 읽은 책 두 번 펼치기 어려운데 열 번을 넘게 읽은 책이다. 난 랴스콜리니코프의 ‘죄’와 ‘벌’을 살아오면서 숱하게 겪었기 때문이다. 책에서 읽었던 한 문구가 어쩌면 내 삶의 지침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죄’는 내가 내게 주는 벌, ‘벌’은 다른 누군가가 내게 주는 벌. 불교에서도 그런 말이 있다나. 옛날 어른들이 하던 ‘죄받는다’라는 말이 스스로에게 주는 가장 큰 형벌이라는 뜻이었으려나.

이 두 가지 벌은 언제나 내가 망가지고 난 뒤에 깨달을 수 있었고, 언제나 ‘벌’은 치욕이었지만 ‘죄’는 고통이었다. 치욕이야 이겨내면 그만이지만 스스로 주는 고통은 늪과 같아서 생각보다 헤어 나오기 힘들다. 그리고 지금 나는 ‘죄’를 받는 중이다. 부화뇌동한 죄. 나를 갈아내면서 정작 나 자신을 챙기지 못한 죄.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만큼 달을 가리키고 흔들어대는데도 저 달은 안 보고 내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으니. 나도 팔 아파 죽겠다고. 나도 편안하게 누워서 잠 좀 푹 자고 싶다고. 그만 좀 물어뜯고 그만 좀 옭아매라고. 제발 네가 뭘 해야 할지 스스로 알고 움직이라고. 제발 네가 할 일을 나한테 그만 좀 떠넘기라고. 제발 한 번 말하면 좀 새기고, 한 번 내뱉은 말은 좀 지키라고.

그래봤자 나는 잠시 인내심을 고갈한 채 이 늪에 빠져 있다가 다시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처럼 칠렐레팔렐레 살아갈 것이다. 젠장.

내가 왜 영화를 시작했더라?

정말 기억나지 않는다. 어떡하다 내가 영화를 시작했는지.

만 스물에 썼던 첫 장편 시나리오가 <2인 1역>이었다. 이 시나리오는 엔딩이 정리되지 않은 채 덮였다. 답을 못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파이트 클럽>(1999, 데이빗 핀처)을 보곤 두 번 다시 들춰보지 않았다. 답을 알고 나니 흥미를 잃었다.

다음으로 쓴 장편이 <그 이름>과 <화이트 포비아>였는데, <그 이름>은 <개 같은 여자>로 소설화했다가 지금은 찾으려면 한참이 걸릴 어딘가의 폴더에 넣어두곤 더 이상 열어보지 않았다. 몇 년 지난 뒤 은희경의 <타인에게 말 걸기> 어느 단편에서 비슷한 걸 읽었다. <화이트 포비아>는 3년쯤 지난 뒤 SBS에서 심은하와 허준호가 나오는 어느 드라마였던가 단막극에서 봤다.

봉준호보다 10년쯤 더 빨리 <기생충>이라는 시나리오를 썼었다. 뭐, 그렇게 쓴 시나리오들이 많은데 다들 덮어버린 이유는 하나다. <파이트 클럽>과 은희경과 봉준호와 SBS 게 훨씬 더 재밌었기 때문이다. 아, 물론 소재와 플롯이 ‘비슷’했을 뿐이다.

왜 영화를 시작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왜 영화를 시작했다고 말해온 건 있다. 나름의 정의(定義)였지. 머릿속에 끊임없이 흐르는 내 생각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서 글로, 영상으로 압축해서 표현하려고, 라고.

그런데 이젠 <황금 뇌를 가진 사나이>의 주인공처럼 내 뇌에는 별로 들어 있는 것도 없었고, 앞으로는 이 별로 안 되는 것조차도 다 써먹지 못하고 살 것이란 현실 자각 또는 (기분 나쁘지만) 두려움. 그리고 그 별로 안 되는 것조차 말로 낭비해 버려 이제는 정말 남은 게 별로 없다는 궁핍함.

그래서 이젠 그만둘 때가 됐나 싶다. 이렇게도 숨 막히는 일을 더 해낼 수 있겠나, 싶다.

영화 때문에 뭔가를 했고, 영화 때문에 뭔가를 그만뒀으며, 영화 때문에 나를 지켰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영화 때문에 내가 너무 힘들고, 영화 때문에 내가 죽을 것 같고, 그리고 영화 때문에 가루가 될 것 같다.

어쩌면 좋지?

이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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