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장터로 변할 때

2025-04-17

오늘은 기독교인들이 성금요일이라 일컫는 날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기억하는 날에 ‘거룩한 성(聖)’자를 더한 것은 그의 죽음의 숭고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잔인한 처형 방식이다. 사형수는 장시간의 고통을 견뎌야 하고, 완벽한 고립감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옷까지 벗겨진 채 십자가에 달림으로 그들은 인간적인 품격조차 박탈당했다. 사람들의 눈에 고스란히 노출된 그들의 몸은 더 이상 존엄하지 않았다. 십자가 아래에 있는 이들은 조롱과 모욕을 가함으로 처형당하는 이들과 자기들을 구별했다. 인간의 잔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현장에서 죽어가는 한 인간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조롱거리로 삼는 순간 인간의 소외는 절정에 이른다.

무지가 열정과 결합하면 폭력이 된다. 폭력은 자기 속에 깊게 자리 잡은 두려움의 이면인 경우가 많다. 생명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 폭력은 생명에 대한 부정이기에 거기에는 아름다움이 없다. 적나라한 폭력의 현장에서 인간의 숭고함을 드러내는 이는 예수뿐이다. 그는 자기를 조롱하는 무리들을 위해 기도를 바친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이가 오히려 사람들의 무지함과 폭력을 사랑으로 품은 것이다. 시인 박두진은 ‘갈보리의 노래’에서 그런 예수의 마음을 헤아려보려 애쓴다.

“마지막 내려덮는 바위 같은 어둠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 뜨물 같은 치욕을, 불붙는 분노를, 에여내는 비애를, 물새 같은 고독을, 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가 있었는가? 꽝꽝 쳐 못을 박고, 창끝으로 겨누고, 채찍질해 때리고, 입맞추어 배반하고, 매어달아 죽이려는, 어떻게 그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시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어떻게’라는 부사는 그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정신의 뿌리를 궁금해한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어떻게’를 굳이 규명하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그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이런 수사 의문문은 우리를 경외심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 세계는 한때 우리에게 속해 있었으나 지금은 잊힌 혹은 잃어버린 세계다.

욕망의 물결에 휩쓸리며 사는 동안 우리는 우러러보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우리가 더 큰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었다. 아름다움과 장엄한 세계에 대한 인식은 이해관계와 동떨어져 있다. 절대로 손해 보지 않겠다는 맹렬한 의지가 작동될 때 삶의 여백은 사라진다. 삶의 더 높은 준거점을 잃어버릴 때 세상은 장터로 변한다. 짐승들이 자기 몸을 부풀려 상대를 제압하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자기를 크게 보이기 위해 진력한다. 패거리를 짓고, 인위적인 방어막을 만든다. 그럴수록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외로움은 심화한다. 내면의 여백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냉소와 혐오, 무례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으로 전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분노의 소리가 들려온다. 인류가 소중하게 가꿔온 모든 가치들이 악마의 맷돌에 갈리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늘 피해를 입는 것은 약자들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휴전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고 그사이에 폭격으로 죽어가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가자지구에서는 구급대원과 구조대원들까지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인류의 오랜 꿈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세상이 그렇다 하여 꿈조차 버릴 수는 없다.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서 조금 비켜난 자리에서 밭을 가느라 여념이 없는 한 농부의 사진을 보았다. 일상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현장에서 그는 검질긴 인내로 일상을 복원하고 있었다. 암흑의 시간에 빛이 도래하도록 힘쓰는 이들이 있다.

비참과 냉혹함으로 얼룩진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은 그렇게 열린다. 지극한 고통을 겪어내면서도 가없는 사랑을 전하던 한 사람을 기억하는 건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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