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4월 16일로부터 11년이다. 훌쩍 시간이 지났다. 그때 당시엔 아이가 없었던 나에겐 그저 안타까움만 있는 사건이었다. 빠른 수습이 되고, 사건의 경위가 밝혀지고, 관련된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지며 마무리될 줄 알았다. 다른 사고들처럼 자연스레 시간이 지나고 무덤덤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옛말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10년이 지나고 11년이 되었다. 그 사고 밖에 있는 사람들은 현실을 살아내고 있었지만 그 동안 그 사고 안에 있던 모든 것은 멈춰 있었다.
물론 현재까지도 늘 사고들은 발생하고, 안타까운 일들은 생기고 있다. 다만 여러 사람이 실타래처럼 엉키고 엉켜 살아가는 사회이다 보니 각자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그 사건들이 잊히고, 지워지고,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나 또한 그러고 살아왔다.
2017년 첫째가 태어났을 때, 그해 4월 16일은 다르게 다가왔다. 그때 들었고, 지금도 잊지 못하는 말이 있다. ‘아내를 잃은 남편은 홀아비, 남편을 잃은 아내는 과부, 부모를 잃은 자녀는 고아라고 부르는 말이 있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를 대신하는 호칭은 없다’라는 말. 매년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더 무겁게 다가오는 말.
어떤 슬픔과 아픔인지 헤아릴 수 없다. 아무리 공감을 잘하는 사람도 심지어 같은 처치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당사자의 마음을 백 분의 일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밝게 인사하며 지냈던 가족이나 친척, 가까운 친구들이 떠나갔을 때도 너무 슬프고 너무 힘들었는데, 만약 내 아이가 그런 사고를 당한다면 나는 어떤 마음이 들까? 이런 고민조차 외면하고 싶은 마음인데 말이다.
그 와중에 2022년에도 전혀 생각지 않은 사고가 일어났다. 젊은 친구들이 길거리에서 사고를 당했다. 그리고 사건 후의 과정은 2014년 4월 16일과 동일했다. 아무런 사고 경위가 밝혀지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이런 나라인 줄 알았으면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고, 혼자 살았어야 했나, 라는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매일 매일이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최소한 개인의 문제로 인한 사고가 아니라면 국가라는 존재는 국민을 책임지고 안전하게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다들 높은 자리에 가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나 보다.
게다가 그런 문제들을 오히려 옹호하고 지지하는 사람들과 사고를 당한 사람들을 오히려 이상한 틀에 가둬 비난하고 욕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보이면 너무나 당황스럽고 화가 나고, 내 입에서 쌍스러운 말들이 뱉어진다.
자고로 높으신 자리에 있는 분들의 가족이었다면, 사고를 당한 가족을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이제 시간이 지났으니 그만하고 잊자고 하는 사람들의 가족이 사고를 당했다면, 그랬을까?
11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까지도 헤아릴 수 없는 마음들이다. 아마도 나에게 그런 사고들이 생기지 않는다면 평생 알지 못하는 마음들일 것이다. 다만 외면하지 않고 잊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부모로서 해야 할 역할일 것이고, 다음 세대를 올바르게 길러내는 중간다리의 역할일 것이다.
류민수 펜을 든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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