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갑철은 카메라 기계의 매뉴얼로 찍어낼 수 없는 것들을 포착한다. 원로 사진작가 강운구가 “생생하게 귀신의 기운을 전해 준 다른 예를 나는 알지 못한다”라고 고백했던 사진가가 바로 이갑철이다. 그래서 “불멸의 것들은 사진에 찍히지 않는다”는 프랑스 철학자 레지스 드브레의 명제는 이갑철의 사진 앞에서 충돌과 반동을 일으키며 혼돈에 휩싸인다. 죽음의 흔적일 수밖에 없는 사진에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기에 그의 사진은 어떤 면에서 항상 으스스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 그런데 이갑철의 이번 사진은 뭔가 번뇌에 휩싸인 마음을 어루만지는 영험함이 느껴진다. 다음 달 4일까지 성곡미술관에서 열리는 《적선(積善)하다_빛으로 그린 어진 마음, 사물을 이루고》 전시다.
“이 중에 시름없으니 어부(漁⽗)의 생애(⽣涯)로다
일엽편주(⼀葉扁⾈)를 만경파(萬頃波)에 띄워 두고
인세(⼈世)를 다 잊었거니 날 가는 줄을 아는가?”
- 농암 이현보의 어부단가 1수
최고의 명필가였던 선조 임금이 농암 이현보에게 두 글자를 하사했다. ‘적선(積善)’. 농암은 경북 안동의 종택 사랑 마루에 임금의 하사품을 걸었다. 굵고 당당한 필체. 적선하는 어진 마음은 농암의 가풍이 되었다.
‘적선’이라는 두 글자를 보았을 때 나는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전시 기획자는 사진가 이갑철과 도예가 김성철이 각자의 작품에 담은 ‘적선’의 의미를 음미해보길 주문한다. 물론 이 둘의 작품에는 무언가를 준다는 행위가 재현되어 있지는 않다. 사진과 도예에 담긴 어떤 느낌이 그러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관람객이 적선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다. 고요함 속에서 움틀거리는 염험한 기운이 적선의 의미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면 전시의 기획은 성공할 것이다.
작품에서 굳이 의미를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좋은 느낌을 받으면 그만이다. 분야는 다르지만 느껴지는 맛이 잘 어울린다. 한지에 녹아든 이갑철의 사진을 김성철의 호롱에 비추어보고 싶어진다. 공기의 흐름에 따라 너울거리는 호롱 빛의 파장처럼 이갑철의 사진 속에는 빛이 일렁이고 있다. 착시현상? 분명 이갑철의 사진은 순간을 종이 위에, 강화 유리 안에, 그리고 한지 속에 포박해 놓았지만 거기에 담긴 나무와 눈과 고택과 강물은 호롱 빛처럼 어른거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