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기의 말에게 말 걸기] 멀리 돌아서 가다(迂)

2024-12-25

한자 ‘우(迂)’는 평상시에는 잘 쓰지 않는 한자다. '한자 자전'에서 이 글자를 찾으면 ‘멀다’라는 뜻으로도 나오고, ‘에돌다’라는 뜻으로도 나온다. 그런데 ‘멀다’라는 뜻이나 ‘에돌다’라는 뜻은 서로 멀지 않다. 사촌쯤 되는 친밀한 뜻이다. ‘에돌다’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다시 찾아보면, ‘곧바로 나아가지 않고 멀리 피하여 돌다’로 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迂)’가 지닌 ‘멀다’라는 뜻에는 단순히 거리가 멀다는 뜻보다는 그 어떤 대상을 멀리 두고 피해 가려 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 그런 뜻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회(迂回)’라는 말이 떠오른다. 곧바로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가는 것이 ‘우회(迂回)’이다. 이 한자어에 대응하는 고유어가 ‘에돌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우(迂)’가 품고 있는 뜻, 즉 ‘곧바로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가는’에 담긴 인생론적 의미는 간단치 않다. 우리가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곧바로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가게 되는 경우는 많다. 그것이 나의 뜻이었던가. 그런 결정을 내가 확실히 내렸던가. 딱히 그렇지도 않다. 그렇게 보면 ‘우회의 인생길’은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하지 못하는 ‘운명의 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 인생을 곧바로 가지 않고 돌아서 가게 되는 데에 나의 판단과 생각은 전혀 끼어들 틈도 없었던가. 그렇지도 않다. 때로는 가던 길을 울면서 돌아선 적도 있고, 때로는 목숨과 생계를 위해서 스스로 돌아서 가겠다고 결정한 적도 있다.

그렇게 보면 ‘우회의 인생길’은 내가 내 현실을 읽어내면서 대처한 지혜의 길일 수도 있고, 그 나름대로 ‘도전의 길’일 수도 있다. 우회하지 않고 살아 온 자가 있는가? ‘우회의 인생길’은 심오하기까지 하다. 우회에는 하늘이 관여하는 어떤 섭리가 작동하기도 하고, 동시에 인간이 성찰하는 어떤 지혜 같은 것이 스며들기도 한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回軍)은 긴 역사의 흐름으로 보면 ‘우회의 지혜’를 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신흥하는 세력 명(明)을 치러 곧바로 나아가다가 그 길을 우회하고 되돌려 온 것은 그가 뒷날 조선을 세워 나라를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5세기 유럽의 해양 세력들이 바다를 통해 인도로 가겠다고 해서 나아갔지만, 그들이 도달한 곳은 오늘날의 아메리카 대륙(서인도 제도)이었다. 자기들도 모르는 우회의 길을 갔던 셈이다. 그 우회는 오류였던가? 그렇지 않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일로 흘러가게 했다.

전쟁의 기술에서는 적의 강한 예봉(銳鋒)은 무조건 피하여 우회할 것을 강조한다. 삼국지에 수백 번도 더 나오는 전술 장면이다. 이보전진(二步前進)을 위한 일보후퇴(一步後退)에는 우회의 진경 철학이 담겨 있다. 적을 험지로 유인하려고 후퇴를 연출하는 것은 우회가 지략의 경지에 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인생의 먼 길을 가며 우회를 생각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돌아서 가야만 닿게 되는 것이 인생 행로의 질서라는 생각도 든다. 돌아서 감으로써 도달하는 데에 인생 경로가 가리키는 ‘성공’이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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