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안의 야만인들

2024-10-07

‘문 앞의 야만인들(Barbarians at the Gate)’은 로마로 대표되는 제국이나 문명이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몰락하기 직전의 상황을 묘사할 때 쓰여온 문구다. 로마 제국의 경계 바깥에 살던 ‘미개한’ 훈족·고트족·반달족·앵글로색슨족 등이 국경을 지속해서 침입해 들어오면서, 로마의 몰락이 본격화되었다는 시각을 담고 있다.

그러한 역사적·문학적 맥락과 무관하게, 이 문구가 오늘날과 같이 경제와 관련해 쓰이게 된 것은 1989년 미국에서 『문 앞의 야만인: RJR 나비스코의 몰락』이라는 책이 출간된 다음부터다. 두 명의 탐사보도 기자가 쓴 이 책은 1980년대 최대 M&A 거래였던, 사모펀드 KKR의 담배·식음료 대기업 RJR 인수 사례를 심층적으로 다룬다. 당시 적대적 인수 시도에 대항하던 RJR의 경영진들이 KKR을 야만인에 빗대어 비난한 것에 착안해 선정한 제목이다. 1993년에는 동명의 영화도 나왔다.

이 인수 건 이후 미국·유럽 등 선진 시장에서 사모펀드의 역할은 막대하게 커졌고, 그들이 방만하게 운영되는 기업들을 목표로 삼아 적대적인 M&A을 시도하는 일은 일상화됐다. 이를 방어하기 위한 창업자와 경영진의 다양한 대응 방안들도 지속해서 개발됐고, 그 결과 주주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자본 시장의 고도화가 완성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런데 한동안 잊혔던 이 문구가 최근 국내에서 회자되고 있다. 대한민국 경제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MBK파트너스와 영풍그룹 컨소시엄의 고려아연 인수 시도 때문이다. 아직은 결말을 쉽게 예측하기 힘들지만, 국가 기간 산업을 담당하는 상장 대기업의 경영권을 두고 수조 단위의 막대한 자금이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 매우 이례적이고 RJR 사례만큼 상징적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앞서 언급한 책의 ‘야만인들’이라는 단어는 사실 역설적인 표현이었다. 저자들은 KKR의 이러한 시도가 RJR의 내재 가치를 찾아 궁극적으로는 주주에게 돌려줄 수 있게 만든 혁신적인 시도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야만인의 침입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본질에서는 내부에 축적되어 온 다양한 문제들이 로마 몰락의 진정한 이유였다는 시각과 일맥상통한다.

같은 맥락에서 MBK파트너스·영풍그룹이 주장하는 것처럼 고려아연의 현 지배구조가 기업의 내재 가치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훼손하고 있다면, 배척해야 하는 야만인은 문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는 선진국 시장에서 사모펀드들과 행동주의 펀드들의 수많은 투자 사례들을 통해 이미 충분히 검증된 가설이기도 하다.

이철민 VIG파트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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