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버터] 속도보다 연결…말레이시아가 로컬 생태계를 만드는 방식

2025-02-19

시간이 지난 후에 진가를 드러나는 색이 있다. 인디고블루. 말레이시아의 이포와 페낭을 걷다 보면 오래된 건물 곳곳에서 발견되는 이 색이 단순한 푸른색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습기와 직사광선이 강한 열대기후에서 이 색은 시간이 지나도 흔적을 남기는 실용적이고 특별한 색이다.

인디고블루는 말레이시아가 시간을 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새것을 덧씌우되 그 아래에 남겨진 것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필요에 따라 새롭게 변형하고 활용하되, 그 본질은 유지한다.

말레이시아의 도시들이 변화하는 방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성급하게 과거를 밀어내지 않고, 현재의 필요에 맞춰 재해석하며, 지역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발전해간다. 폐광 도시였던 이포는 생태와 문화를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클랑과 풀라우케탐은 이민자 공동체의 유산을 바탕으로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갔다. 쿠알라룸푸르의 GMBB는 단순한 상업 공간이 아니라 창작자들이 모여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는 곳이 되었다.

이포: 주석광산 도시에서 문화·생태 허브로

20세기 초반, 이포는 세계 최대 주석 생산지 중 하나였다. 주석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렸지만, 1980년대 국제 주석 가격 폭락과 함께 도시 경제는 붕괴했다. 한때 활력이 넘치던 거리는 텅 비었고, 폐광은 방치되었다. 이포는 쇠락의 길을 걷는 대신 과거를 보존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방향을 택했다. 폐광 지역에서 SEAD(지속 가능한 환경 및 디자인 연구소)와 BSM(Bamboo Stewardship Malaysia)은 대나무 기반의 생태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지속가능한 개발을 실험하고 있다. 주석광산의 흔적이 남아 있는 역사적 건물들은 리노베이션을 거쳐 카페, 갤러리, 복합 문화공간으로 변신했다.

이포에서 진행된 변화는 단순한 관광 개발이 아니다. 주석광업의 흔적을 보존하며, 그 위에 새로운 문화와 생태적 접근을 더해가는 방식이다.

클랑과 풀라우케탐: 이민자 공동체가 만든 지속가능한 삶

클랑은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 도시 중 하나다. 말레이시아 이민자 역사와 함께 성장한 이곳에서는 하이난계 중국인들이 정착하며 만든 독특한 로컬 문화를 볼 수 있다. 클랑에서 배를 타고 가야 만날 수 있는 풀라우케탐은 더 극적인 방식으로 변화를 보여준다. 이 마을에는 자동차가 단 한 대도 없다. 모든 이동은 전동 스쿠터와 자전거로 이루어지며, 집들은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세기 후반 중국계 어부들이 정착하며 형성된 이곳은 여전히 어업을 기반으로 살아가지만, 관광과 생태 보호를 접목하며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모색한다. 주민들은 기존 생활 방식을 유지하면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길을 찾고 있다.

GMBB: 쿠알라룸푸르 도심 속 창조적 공간

‘사람들이 떠난 빈 건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전 세계적인 고민이다. 쿠알라룸푸르 도심 한복판에 있는 대형 쇼핑몰 ‘GMBB’는 이에 대한 일종의 실험이었다. GMBB는 단순한 상업 공간이 아니라 예술가·디자이너·크리에이터들이 모여 창작과 실험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운영된다. 독립 예술가들과 로컬 기반 브랜드가 협업하면서 전시회, 워크숍, 문화 이벤트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GMBB는 창조적 커뮤니티가 어떻게 ‘경제적 가치’와 연결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단순히 공간만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들이 지속해서 활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예술과 경제를 연결하는 방식을 고민한다.

속도보다는 연결, 말레이시아의 컬렉티브 임팩트

말레이시아의 혁신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지 않는다. 빈티지 블루처럼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하고 다양한 가치들이 섞이며 새로운 흐름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고 협력한다는 점이다. 지역 주민, 창작자, 생태 운동가, 연구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변화를 만드는 ‘컬렉티브 임팩트(Collective Impact)’가 핵심이다.

지난 15년간 지역활성화랩 ‘마르텔로’를 운영하며 한국의 로컬 생태계를 만들어왔다. 이번 방문을 통해 마르텔로는 말레이시아의 혁신 모델을 한국 지역의 맥락에 맞게 적용하는 방법을 탐색했다. GMBB와는 창작자 중심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방식을 한국에 적용하기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공간과 커뮤니티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속도보다는 연결을 중시하며, 전통과 현대가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방식으로 지속가능한 혁신을 만들어가는 말레이시아의 혁신은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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