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 커피

2025-08-19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이 갓 주목받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가까운 후배가 이 노래 한번 들어보라며 동영상 링크를 보내줬다. 제목이 ‘싸구려 커피’라 했다. 후배와 달리 당대 국내 인디 음악계를 거의 알지 못했던 난, 별 기대 없이 재생 버튼을 누르고 저편에 앉아 책을 펼쳤다. 몇 소절 지나지 않아 책에서 눈을 뗀 채 노랫말에만 귀를 쫑긋했다. 이제껏 경험 못한 독특한 감각이면서도 정서적으론 친숙했다. 몇번씩 반복해 들으며 이 ‘화상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랩인지 타령인지 모를 톤으로 “언제 땄는지도 모르는 미지근한 콜라가 담긴 캔을 입에 가져가 한 모금 아뿔싸 담배꽁초가”라 읊조리는 대목에 이르면 매번 웃음이 터졌다. 그게 어떤 상황일지 그려져서였다. 요컨대 이런 장면이었다.

늦여름 오후, 공강 시간에 학회실로 들어서니 실내금연 규정에 아랑곳하지 않은 선후배들이 몰래 피워댄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구멍 숭숭 난 낡은 소파에선 몇몇이 기타를 딩둥거리고 있고, 허세 넘치는 고뇌와 어설픈 사랑론이 적혀 있던 사이로 중화요릿집과 분식집 배달번호가 휘갈겨진 낙서장이 탁자 위에 펼쳐져 있다. 낙서장을 넘기다 목이 말라 누군가 마시다 두고 간 듯한 캔 음료를 집어 든다. 미지근한 캔에 무심코 입을 대었다가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안을 들여다보자 아뿔싸, 거기엔 담배꽁초가! 한두 번 당했던 게 아니었다. 한 모금 삼킨 후 캑캑 뱉어낸 적도 있다. ‘콜라’란 단어에 담배꽁초부터 연상하는 사람이 세상에 나 말고는 없을 줄 알았는데 이 정서를 포착해 음악으로 옮겨내다니, 경이로웠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에선 동기의 자취방으로 우르르 몰려가 소주 마시며 왕가위의 영화를 보다 이부자리도 펴지 않은 채 장판 바닥에서 잠들었던 여름밤이 떠올랐다. 쓸쓸할 때 ‘싸구려 커피’를 떠올리면 명랑해졌다. 그렇게 주기적으로 찾아 듣다 우연히 어떤 평을 읽게 되었다.

“기억하기조차 싫은 뜨뜻미지근한 감정이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 누군가 블로그에 남긴 감상이었다. 글쓴이는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우울의 늪으로 가라앉는 느낌이라 했다. 그러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 없이 영속될 것만 같은, 고시원 반지하의 무기력한 날들에 대해 적고 있었다. 일순간 당황했다. 기억의 수면 위로 솟아오른 감정이 뜨뜻미지근하고 울적한 것이리라 미처 예상 못했기 때문이다. 짓궂지만 유쾌한 빛깔과 냄새와 감촉을 지닌 것일 줄 알았다. 다른 이들도 나처럼 노랫말에서 20대 초반 무렵 동아리방이나 친구네 자취방, MT 이튿날 아침 등의 에피소드를 떠올리리라 막연히 가정했던 셈이다. 어쩌면 내가 품었던, 음악적 취향과는 결이 다른 모종의 친밀감 또한 은밀하고 견고한 문화자본을 전제하고 있었으리란 자각을 그날 처음 갖게 됐다. 일정한 ‘가방끈’을 지닌 특정 연령대가 느슨하게 공유하는 과거 한 시기의 감수성 같은 것 말이다.

여전히 ‘싸구려 커피’를 즐겨 듣는다. 에스프레소 마시며 캔 음료의 기억을 복기한다 해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고 믿는다. 사실 그리움이나 정겨움 같은 온기 어린 감정의 팔할은 느슨하게 공유하는 과거 한 시기의 감수성으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런 생각을 한다. 그 감수성을 ‘우리’라고 하는 울타리를 치는 데에 남용해선 안 되겠다는. 내면에서 길어 올린 사소한 기억을 소재 삼은 글쓰기 자체를 내가 그만둘 순 없더라도 이를 함부로 일반화해 뭔가 단호히 주장하려 들거나 자신의 좁다란 경험 세계를 예시로 들며 섣부른 계도를 시도하면 안 되겠다는. 저 노래 듣고 우울해하는 대신 명랑해질 수 있었던, “세숫대야에 고여 있는 물” 같던 시기에 그 바깥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했고 이젠 그 바깥으로 나온 세대 혹은 계층에 속할 사람은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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