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국민은행이 지난해 국정감사 당시 양종희 KB금융 회장의 국정감사 증인 출석을 피하기 위해 맺었던 '상생협약'이 정권교체로 오히려 회사의 부담을 키우고 있다. 조기대선에서 당선된 이재명 대통령이 ‘위험의 외주화 철폐’와 ‘AI 시대 노동자 보호’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KB는 과거의 미봉책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현안으로 떠안게 됐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 당시 KB국민은행 콜센터 직원들의 처우 개선과 정규직 전환 논란은 금융권의 핵심 쟁점이었다. KB국민은행 노조위원장 출신인 박홍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콜센터 업무의 하청구조 문제를 지적하며 양종희 KB금융 회장을 국감 증인으로 신청했다.
그러나 KB국민은행은 국정감사를 하루 앞둔 10월 14일, 급히 하청업체 및 노조와 함께 ‘상생협약’을 발표했다. 이 협약에는 ▲근로자 보호 항목을 협력사 평가에 포함 ▲노사·원청 협의체(TF) 구성 ▲연 2회 근로자 간담회 개최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이 협약 발표 직후 국정감사 증인 신청은 철회됐고, KB금융 회장 출석 논란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정작 핵심이었던 ‘정규직 전환’ 등 본질적인 문제는 논의 대상에서 빠졌다. 협약 이후에도 고용구조 개선이 지연되자 일각에선 “사실상 국감을 피하기 위한 면피용이었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센터 업무가 KB가 추진했던 AI 기술 도입으로 인한 상담 업무 자동화는 필연적으로 인력 감축을 수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상생협약이 현실적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후 상황은 정권 교체를 계기로 급변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대통령이 12·3 계엄 선포 문제로 탄핵됐고, 조기 대선을 통해 노동 친화적인 이재명 대통령이 당선됐다. 이 대통령은 ‘불법 하도급과 위험의 외주화 철폐’와 ‘AI 기술 발전 속 노동자 보호 강화’를 핵심 공약으로 강조했다. 이 공약은 노동계와 시민단체의 호응을 받으며 정부의 주요 정책 기조로 확립됐다.
이에 따라 KB국민은행은 새로운 정부 기조와 충돌하는 처지에 놓였다. 인건비 절감을 위해 AI 상담 시스템 도입을 추진해온 은행은 이제 하청 인력의 정규직 전환 또는 고용 유지 압박에 직면하고 있다. 특히 과거 상생협약이 정규직 전환에 대한 구체적 계획 없이 마무리된 점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르면서 KB의 입장은 더욱 곤란해졌다.
노동계는 “일회성 협약으로 문제를 덮은 결과가 결국 현안으로 돌아왔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정부는 AI 도입 과정에서 노동자 보호 대책을 병행하지 않을 경우, 고용노동부 차원의 특별근로감독까지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AI 기반 업무 전환과 정부의 노동 정책 사이에서 은행들이 딜레마에 빠졌다”며 “KB는 이제 단순 협약을 넘어선 실질적인 정규직 전환 로드맵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 경기신문 = 고현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