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165〉우리별 1호를 만든 사람들

2025-06-17

“와, 성공이다. 박사님 축하합니다.” 1992년 8월 11일 오전 프랑스령 기아나 쿠루 우주기지센터.

세계 22번째로 과학위성 우리별 1호기 발사에 성공하자 최순달 당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소장에게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

우리별 1호 발사 성공까지 과정은 험난했지만 결과는 위대했다. 우주를 향한 최순달 박사와 젊은 과학자들의 꿈이 우리별 1호 발사 성공이라는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

최 박사는 당시 감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 순간은 내 삶 전체를 통해 가장 빛나는 기억으로 뇌리에 각인돼 있다. 내가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신에게 그때의 일에 감사를 드린다.”(48년 후 이 아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립니다)

한국 인공위성의 개척자이자 아버지로 불리는 최 박사는 대구공고와 서울대 공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유학길에서 올라 버클리대 학사와 석사, 스탠퍼드대 대학원에서 전자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휴렛팩커드 연구원과 캘리포니아 공대 부설 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JPL)에서 근무했다. 귀국 후 금성사 초대 중앙연구소장, 한국전기통신연구소(현 ETRI) 초대 소장을 거쳐 전두환 정부에서 체신부 장관을 지냈다. 이어 한국과학기술대학(KIT, 현 KAIST) 초대 학장, 한국과학재단(현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과학기술계 원로임에도 최 박사는 1989년 봄 KIT 평교수로 돌아왔다. 그는 연구과제로 인공위성을 선택했다.

최 박사가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

“우주기술은 국가 발전의 필수라고 생각했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 대학에서 인공위성 연구와 개발을 시작했다. 젊은 두뇌가 사명감을 발휘해서 전력투구할 때 승산이 있기 때문이다. 인공위성 계획 제안자인 나부터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국 JPL 근무 경력도 오래전 일이고, 그동안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최 교수는 과학기술 잡지를 통해 영국 2개 대학에서 위성설계와 분석 강좌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우샘프턴대에서 위성체 관련 단기강좌를 1989년 7월 16~21일, 서리대가 탑재체 공학과 통신위성에 관한 단기 강좌를 7월 23일부터 1주일 동안 연다는 기사였다.

최순달 교수는 직접 강좌에 참석기로 했다. 한국과학재단에서 해외연수 경비와 학교에서 여비를 받아 7월 초 영국으로 출발했다. 예상보다 많은 과학자가 참석했다. 서리대 배리 에번스 교수의 강의가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그들이 만드는 위성은 50㎏급 초소형이었다.

최 교수의 회고.

“나는 이곳의 소형위성 분야에서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발견했다. 인공위성 중에서도 적은 예산으로 가장 빠른 시일 안에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 검토한 결과 영국 서리대에 그와 같은 대학원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학생과 교수가 연구실에서 새로운 기술을 하나씩 개발해 가는 일도 가능하지만 우수한 학생을 선발해서 맞춤형 유학을 보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최 교수는 학생 유학을 위해 다시 영국 서리대로 날아갔다. 에번스 교수와 스웨팅 교수를 만났다.

“학생 5명을 영국 신학기가 시작하는 1989년 10월 1일 입학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단 등록금은 1990년 3월에 내겠습니다.”

“학생을 받아들이는 일은 좋지만 외상 교육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시 영국에는 최 교수와 친분이 있는 이들이 있었다. 영국 최대 전자회사 GEC 마르코니의 기술이사 빌 바도 박사와 친구인 팩 시노트였다.

최 교수는 두 사람과 만났다. 인공위성 개발을 위한 학생 파견과 기술훈련 계획, 위성 제작 과정 등을 설명했다. 그리고 서리대에 한국 학생들이 입학할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바도 박사는 1990년부터는 3년에 걸쳐 25만~30만달러를 지원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다시 서리대로 가서 한국 학생 5명의 입학 허가를 받았다.

그해 7월 29일 최 교수는 에번스 교수실에서 한국과 영국 사이의 위성기술 개발과 인력 양성에 관한 '국제 공동연구를 위한 협약서'를 작성했다.

최 교수는 귀국하자 마자 영국 유학생 모집 공고를 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을 개발한 유학생을 모집합니다.”

유학 설명회에서 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국내 최초로 우주기업을 창업한 박성동 전 쎄트렉아이 의장은 회고했다.

“너희가 공부하는 데 들어간 비용 중 일부는 시장에서 채소와 생선을 파는 할머니 전대에서 나왔음을 명심해라. 받은 혜택의 곱절을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가져라.”(쎄트렉아이 러시)

지원자는 교수 면접을 거쳐 최종 5명을 선발했다. 5명은 김형신, 최경일(이상 전산과), 김성헌, 박성동, 장현석(이상 전자과) 등이었다.

최 교수는 한국을 떠나는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위성을 여러분 손으로 만들고 여러분이 우리나라 우주산업의 개척자라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항시 간직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하네.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게.”

김형신 충남대 컴퓨터융합학부 교수는 “국민 세금으로 공부했으니 성공해야 한다. 만약 실패하면 도버해협에 빠져서 한국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하셨다”고 회고했다.

이들은 햄버거, 중국집 등에서 일하면서 1년 만에 시험과 논문을 통과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 서리대 측에서 인공위성 개발사업에 필요한 돈으로 230만파운드(약 35억원)를 요구했다.

최 교수는 이우재 체신부 장관을 만나 인공위성 개발 사업을 설명했다. 이 장관은 흔쾌히 “매년 10억 원씩 4년 동안 40억원 지원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장 쓸 돈이 없었다. 최 교수는 기업체 등에 지원을 요청했다. 소득이 없었다.

그때 양승택 한국통신기술주식회사 사장이 최 교수를 찾아왔다. 최 교수가 ETRI 원장 시절 양 사장은 전전자교환기(TDX) 개발단장이었다.

“정부 지원이나 과학재단 연구비 지급까지는 시일이 걸립니다. 우리 회사는 규모가 작아서 많은 도움은 드리지 못하지만 우선 이 돈으로 급한 불부터 끄시죠.”

양 사장은 1000만원을 KIT에 입금하고 돌아갔다. 최 교수는 이 돈으로 우주항공제안서 인쇄 등 시급한 사무 처리를 했다.

1990년 6월 과학기술처와 체신부가 공동으로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해 8월쯤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국책과제로 선정했다.

그해 8월 31일 대덕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에서 지상국 개국식을 갖고 출범했다.

최 교수는 우리별 1호 발사에 성공하기 위해 학생 27명을 해외로 유학 보냈다. 26명이 KAIST 졸업생이었다. 유학 간 학교는 영국 서리대와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일본 도쿄대, 미국 아이오와대와 컬럼비아대 등 5개 대학이었다.

1990년 10월부터 서리대 위성 제작에 참여한 학생들은 실험실에서 날밤을 새우며 연구하고 일하느라 “일벌레” “공부벌레”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들은 휴지통을 뒤져 가며 기술을 익혔다. 이들은 각자 전공과 특성에 맞는 위성의 각 부문을 나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성했고, 그것을 우리별 1호라는 결정체 안에 결합했다.

서리대 에번스 교수는 이들의 노력으로 완성한 우리별 1호를 극찬했다.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제작한 소형 위성 가운데 성능이 가장 우수한 위성이라고 생각한다.”

1992년 7월 13일. 발사 28일을 앞두고 최 교수는 다시 서리대를 방문해 연구원들을 만났다.

연구원 가운데 일부는 우리별 1호를 따라 쿠루 발사 기지로 갔고 다른 연구원들은 인공위성연구센터 지상국 운영을 위해 귀국했다.

최 박사는 우리별 1호 발사 성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별 1호는 자신들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참여해 준 동료 교수들과 우리 연구원들이 흘린 땀방울의 결정체였다. 사람이 만들어서 우주로 띄운 희망의 별이었다. 그리고 전 국민의 관심 속에 우리 손으로 광대한 우주에 자랑스럽게 내건 '대한민국 문패'였다.”

우리별 1호 발사는 우주를 향한 대한민국의 위대하고 담대한 도전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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