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경향] “12월 3일 밤 10시 30분 윤석놈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1차 계엄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 모두가 잠든 새벽, 기습적인 2차 계엄 선포. 계엄군과 시민군의 전국적인 내전이 발발했다. 오늘은 내전 발발 7일째 되는 날이다.” 쿵쿵쿵, 군홧발 소리가 이어지더니 한 여성이 부스럭 소리를 내며 텐트를 열고 등장한다. “이마에 피가 너무 많이 나요.” 슥슥, 슥슥 거즈로 당신의 얼굴을 닦아준다. 이어폰에서 들리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유튜버 하쁠리(활동명·37)가 지난해 12월 19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린 ASMR 영상의 한 장면이다. 2차 계엄 후 내전을 피해 산속으로 도망친 시민을 치료해주는 가상의 상황을 ASMR로 구현했다. ASMR은 손으로 물체를 두드리고, 입으로 음식을 씹고, 속삭이며 대화하는 등 소리로 청각을 자극하는 영상을 말한다.
“유튜브에 영상은 너무 많다. 너무 많은 자극이 오기도 한다. 그런데 ASMR은 누군가를 편안하게 만들려고 작정하고 만든 영상이다. ASMR 콘텐츠는 나를 배려해주는 영상이니까 보는 분들이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
2010년대 들어 ASMR이 처음 나왔을 땐 ‘도대체 이게 뭐냐’는 반응이 많았다. 지금 ASMR은 아이들 미연, 엔하이픈 니키 등 유명 아이돌그룹 멤버들이 찍을 정도로 대중적인 콘텐츠다. 내용, 방식은 진화했다. 단순히 소리의 반복을 넘어 극을 창작하는 영역으로 나아갔다. ASMR이 스트레스와 불안 해소에 긍정적 효과를 준다는 연구도 나왔다. 자극적이고 시끄러운 영상이 대세인 유튜브 세계에서 ASMR은 고요함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유일무이한 콘텐츠다.
하쁠리는 창의적인 스토리와 소품으로 인기를 끄는 대표적인 ASMR 유튜버다. 2015년 7월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10년 가까이 ASMR 영상을 제작해 올리고 있다. 구독자 수가 123만명이나 된다. 지난 5월 2일 전화 인터뷰로 그가 지난 10년여간 ASMR 콘텐츠 창작자로서 어떤 과정과 고민들을 거쳤는지 들어봤다.
-처음 ASMR 영상을 만들겠다고 생각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원래는 ASMR을 몰랐다. 치과의 치위생사로 일하다 9급 공무원 준비를 했는데 공부가 잘 안 됐다. 우울증과 불면증이 심하던 때였다. 이 공부를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밤에 생각이 너무 많으니까 (인터넷에) ‘잠 잘 오는 영상’, ‘잠자는 법’을 검색해봤다. 그러다 ASMR이라는 것을 보게 됐다. 좌우(이어폰)에서 소리가 나오는 게 정말 신기했다. 보자마자 빠져서 ‘이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뛰어들었다.”
-2015년엔 ASMR 콘텐츠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을 것 같은데.
“처음에 준비했던 건 마이크와 컴퓨터였다. 처음부터 카메라로 영상을 녹화해서 올린 건 아니었고 생방송으로 시작했다. 그때는 유튜브보다는 아프리카TV(현 SOOP) 같은 방송이 활성화돼 있을 때였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방송을 해야지’라고 생각했다. 방송에서 소통하면서 시청자들이 ‘이런 소리 좋아요’, ‘저런 소리 좋아요’ 하면 실시간으로 소리를 들려주곤 했다. 그 방송을 녹화해서 유튜브에 올리는 방식이었다.”

-ASMR 영상을 만들면서 어떤 것이 재미있나.
“제가 평상시에 엉뚱한 생각을 많이 한다. 치위생사로 일할 때는 그 엉뚱한 생각을 써먹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 (ASMR에서는) 누군가는 쓸데없는 망상이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 할지 모르는 상상을 현실화시킬 수 있었다. 그게 정말 좋았다. 내 상상을 이용할 수 있는 창작이 재미있었다.”
-시청자들은 완성된 영상만 보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환경에서 촬영하는지 알 수 없다. 어디서 어떻게 촬영을 하는 것인가.
“근 몇 년간은 집(경기 양주시)에 방음부스를 놓고 했다. 그런데 방음부스를 사용하니 좁은 공간이라 그런지 소리가 너무 뾰족해졌다. 소리가 귀가 아프게, 바늘처럼 톡톡 쏘는 것처럼 들리더라. ‘소리를 좀 퍼뜨리자’ 싶어 지금은 조금 넓은 공간, 거실이나 방에서 촬영한다. 상황극 같은 경우는 촬영에 4~5시간 정도, 편집에 이틀 정도 걸린다. 소품 준비까지 합치면 일주일 정도 걸린다.”
하쁠리의 ASMR 영상은 창의적인 스토리와 소품이 특징이다. 귀 파주기, 메이크업해 주기, 수술해 주기 같은 전통적인 인기 아이템도 물론 있다. 여기에 ‘버려진 곰돌이가 다른 행성에서 새살림 꾸리는 이야기’, ‘직장인 3년차 미자의 브이로그 이야기’같이 새로운 스토리를 더한다. 또 스토리의 장면 장면을 종이로 만든 상황극 수제북, 모형 귀에서 돌 빼기 같이 신기한 소품을 활용한다. 소리를 통한 청각 자극과 이런 스토리, 소품이 결합해 시청자들은 마치 상상의 공간에 실제 있거나, 바로 옆에서 듣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쁠리는 ‘스토리는 뜬금없이 떠오르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며 ‘생각이 나면 바로 메모장에 적고 구체화를 한다’고 했다. 모든 물건이 두드리면 다 소리가 나지만 그중에서 사람이 쉬고 잘 때 듣기 편한 소리가 나는 물건을 찾는 것도 ASMR 창작자의 몫이다.
-영상에 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다양한 소품, 물건이 등장하는데 어떻게 만들고 선정하는 건가.
“제작이 필요한 소품은 직접 제작한다. 예전엔 손재주 없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생각했는데 이제는 수제북 같은 경우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만든다. 그림이 필요하면 직접 그리고, 라이선스가 필요한 사진은 받아서 만든다. 다른 유튜브도 많이 참고한다. 수제북을 만들 때 종이를 조작하는 기술이 필요하면 페이퍼 메커니즘이라 검색하면 방법이 나온다. 취미가 많아서 취미에 관련된 물건이 일단 많다. 타로, 원석, 실링왁스 등. 평상시에 소리가 좋을 것 같은 물건을 사 모은다.”
-모형 귀에서 돌을 빼거나 모형 얼굴에서 피지를 뽑는 영상은 현실감이 커서 더욱 흥미로웠다.
“귀 돌 빼기 영상은 귀부터 실리콘으로 직접 제작하고 귀 돌도 직접 만들어서 심은 것이다. 실리콘 귀를 제작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실력이 부족해 기포가 잔뜩 낀 실리콘 귀가 만들어졌다. 구멍 송송 뚫린 귓속에 무언가를 집어넣으면 재밌겠다는 생각에 귀 돌 빼기 영상이 나오게 됐다. 피지는 직접 만들어 사용한 영상도 있고 요즘엔 피지 뽑는 장난감도 판매하고 있어서 그것도 이용했다.”

-영상을 만들 때 어떤 부분에 가장 신경을 쓰나.
“보는 사람들이 편안할까를 가장 많이 신경 쓴다. 아무리 제 상상력을 현실화하는 작업이라 해도 목표는 편안함을 유도하는 영상을 찍는 것이다. 밸런스가 안 맞거나 어딘가 거슬리면 듣다가 잠이 깰 수도 있어서 계속 들어보면서 음향을 조절한다.”
-편안한 영상은 어떤 것인가.
“누군가 머리를 만져준다거나, 누군가 나를 정성스럽게 케어해준다거나, 쫑알쫑알 수다를 떨어준다거나. 내가 일상생활에서 편안하다고 느꼈던 순간을 상황으로 만들어주려고 한다. 수제북을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다. 누군가가 동화책을 읽어주면 편안하지 않나. 단순한 수다 영상을 찍더라도 이 주제가 과연 편안한 것인가를 신경 쓴다.”
-왜 사람들이 그런 편안한 ASMR 영상을 많이 찾는다고 생각하나.
“일상이 너무 힘들어 그렇지 않을까. 사회가 사람을 좀 예민하게 만들지 않나. 각자 인생이 너무 힘드니까 사람들이 뾰족해진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집중시켜줄 수 있는 것을 찾는 게 아닐까 싶다. 유튜브에 영상은 너무 많다. 어떤 영상을 보면 생각이 너무 많아지기도 하고, 너무 많은 자극이 오기도 한다. 그런데 ASMR은 누군가를 편안하게 만들려고 작정하고 만든 영상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아무래도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배려하고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 많은데 ASMR 콘텐츠는 나를 배려해주는 영상이니까 보는 분들이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
하쁠리는 12·3 비상계엄 사태를 비롯해 국정농단, 성범죄 등 사회이슈를 소재로 한 ASMR 영상도 몇 차례 올렸다. 2016년 말 국정농단 사건을 패러디해 ‘매선침 시술’ 상황극을 ASMR로 만들었다. 이 영상은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한다. 2018년 미투(#MeToo·나는 고발한다) 운동이 전개될 때는 지하철 성추행범에게 수술을 하는 가상 이야기를 ASMR로 만들었다.
-국정농단, 성범죄, 계엄 등 사회 이슈를 소재로 한 ASMR은 다른 채널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콘텐츠다. 어떤 생각을 갖고 만들었나.
“저는 그렇게 멋있는 사람도, 평상시 사회이슈에 엄청난 관심을 갖고 보는 사람도 아니다. 가끔 크게 터질 때 관심을 갖고 보는 정도이고, (영상을 만든 것도)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니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을 것 같아서 만들었다. 성범죄자 같은 경우 솜방망이 처벌이 심한데 내가 법 개정을 할 수는 없지 않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영상에서 내가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 대리만족하는 거였다.”

-영상 제작 과정에서 우여곡절은 없었나.
“한 영상이 기억난다. 5년 전쯤이었다. 비누로 귀를 만들어 소리를 내는 ‘비누 귀’ 시리즈가 있는데, 생각했던 소리가 안 났다. 눈물이 났다. 그때는 제가 지금보다 예민하다 보니 용납이 안 되고 스스로 감당이 안 됐다. 그래도 영상을 올렸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반응이 너무 좋았다. 지금은 조회 수가 380만회가 넘었다. 그 영상을 기점으로 성격이 좀 변한 것 같다. 그전에는 생각했던 소리가 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버리고, 울고 그랬는데 이후로는 ‘나한테 안 좋은 소리가 다른 사람들한테는 좋게 느껴질 수 있구나’로 바뀌었다. 나만의 것으로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시청자들에게 맡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하게 됐다.”
-보람을 느낀 때는 언제인가.
“항상 보람을 느낀다. ‘내가 사람들에게 편안한 시간을 조금이나마 주고 있구나’ 느낌이 든다. ‘힘든 시간을 하쁠리님 덕분에 버텼다’는 메시지가 많이 온다. 그래도 ‘내가 하는 일이 의미가 있구나’ 생각을 많이 한다.”
-그래서인지 하쁠리 영상은 시청자를 위로해주는 내용이 많다. 또 자기 이야기도 많이 하는 것 같다.
“젊은 시절에 방황을 많이 했다. 기댈 사람이 없었다. 혼자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ASMR은 20분이라는 짧은 영상에 사람들이 굉장히 집중하는 콘텐츠다. 내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시간을 통해) 그들의 시행착오를 줄여주면 어떨까 싶어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계속 ASMR 영상을 만들 계획인가. 구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봐주는 분들이 있다면 계속 만들 것이다. 한 곳에 멈추지 않고 연구하고 발전하자는 생각을 한다. 구독자로부터 ‘초등학교 때 봤는데 이제 취업 준비한다’, ‘수험생활이나 학창 시절 힘들었을 때 도와줘서 고맙다’는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내가 누군가의 인생 한 페이지를 같이했다는 것에 감회가 새롭다. 나도 모르는 추억을 공유하는 느낌이다. 구독자들에게는 고맙다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너무 고마운 존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