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불렀던 ‘사계’ 가사다. 낭만적으로 들려도 실은 1970년대 당시 자신의 몸을 갈아넣고 노동하던 젊은 여성 노동자들의 눈물과 땀을 노래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
한 시대 전체가 그랬다. 경공업으로 시작한 한국경제는 대량의 나이 어린 저숙련 저임금 노동자를 집단적으로 요구했고,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청소년들의 희생에 의해 지지되었다. 국가와 기업은 이들을 ‘산업 역군’이라고 추켜세웠지만, 사실 이들은 기본적인 삶의 권리도 포기한 채 기계 앞에 붙들려 있어야 했던 어린 노동자일 뿐이었다.
‘사계’의 가사는 이렇게 끝난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청춘만이 아니었다. 학교 다닐 기회도 잃어버렸다. 젊은 전태일이 일하던 1970년 동대문 일대만 해도 봉제 노동자 숫자가 3만명에 달했고, 이 중 80% 이상이 10~20대의 ‘여공’이었다. <열세살 여공의 삶>을 쓴 저자는 아버지가 학교에 보내준다는 말에 순순히 서울로 따라나섰지만 결국 열세살에 평화시장 ‘시다’로 인생을 시작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당시 여공들의 절반은 아마도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공장에 부설된 산업체부설 중·고등학교를 가진 기업이 인기였다. 비록 이들의 몸은 공장에 묶여 있었지만, 그 마음속에는 언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도 가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어려서 일터로 갔던 사람들은 이제 시간이 흘러 어느새 고령자가 되었다. 이들의 잃어버린 교육기회를 늦게나마 보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 바로 평생교육법이다. 평생교육이 표면적으로는 미래세대의 계속교육을 지원하는 법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 그 출발은 산업화 세대·베이비붐 세대처럼 교육적 결핍을 경험한 고령자에 대한 교육적 보상의 개념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한참 늦었다. 한국사회에 사회복지 개념이 법제화되기 시작했던 것이 1980년대였던 반면, 교육복지로서의 평생교육은 2000년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국가사업이 되었다.
그런데 이 법이 시행된 지 25년이 된 시점에서 보았을 때 한국의 평생교육은 또 하나의 새로운 학습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있다. 산업화시대에 벌어졌던 학습격차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2023년을 기준으로 볼 때, 25~29세 청년층의 평생학습 참여율(44.8%)은 산업화 세대인 70~79세 고령층 참여율(23%)의 두 배에 가깝다. 학력별로도 대졸 이상 참여율(39.9%)이 중졸 이하(22.1%)보다 훨씬 높다. 월 가구소득별로 볼 때 월 500만원 이상 소득 가구 참여율(36.1%)이 150만원 이하(21.2%)에 비할 바 아니다. 비취약계층의 참여율(32.8%)은 취약계층(22%)을 능가하며, 상용근로자 참여율(40.0%)은 임시 및 일용직(25.2%)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또한 그 차이가 참으로 구조적이며 체계적이기까지 하다. 사회 평등화라는 차원에서 학습을 더욱 필요로 하는 집단이 고령층, 저학력층, 저소득층, 취약계층, 임시직 등일 테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한국의 평생교육 정책은 그 초기의 취지를 실현하고 있지 못하며, 오히려 사회적 약자층이 겪는 학습격차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학습격차만큼이나 큰 문제는 바로 사회 전체의 평생학습참여율이 놀라울 만큼 낮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평생학습참여율은 겨우 32%에 불과하다. 형식교육과 비형식교육을 통틀어서 1년 동안 단 한 번도 교육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의 비율이 성인 전체의 68%나 된다. 그만큼 일반 시민들의 삶이 교육에서 멀어져 있다.
돌아보면, 한국의 평생교육이 그동안 쌓아온 성과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하지만 문제점도 적지 않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평생교육이 사회 전반의 학습격차를 줄이지 못할 만큼 전격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그 첫번째 문제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는 사회의 구조적 왜곡을 변혁해나가는 과정에서 평생교육에 대한 사회적 존재감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인류가 당면한 궁극적인 문제들, 예컨대 기후변화, 민주주의 후퇴, 노동 양극화 등에 대해서 크게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학습소비주의적인 현재의 평생학습의 틀을 넘어서, 공존과 혁신을 향한 사회변혁의 촉진자로 평생교육의 의미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교육활동을 처음부터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