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시간의 밤샘 촬영, 상반신 도색, 과감한 허리 노출, 땡볕 아래 전신 타이즈 착장…. ‘국중박(국립중앙박물관) 분장대회’ 우수작 출품팀들이 16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후기들은 하나같이 고생스러웠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해야만 했냐”는 질문이 절로 나왔는데, 이에 대한 반응도 한결 같았다. “우리 유물의 아름다움, 역사를 알리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힘든 줄 몰랐다”고 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흥행 이후 주요 관광지로 자리매김한 국립중앙박물관이 또 한 번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번엔 유물 코스프레다. 박물관이 보유한 전시품으로 분장한 후 사진과 간단한 설명을 보내는 이번 대회에 83팀의 지원작이 몰렸다. 박물관 측은 13일 밤 10개의 우수 작품을 공개한 데 이어, 오는 27일 열리는 시상식에서 구체적인 순위를 발표한다.
공개된 우수 작품 중 보물 제2001호인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한 쌍으로 분장한 ‘귀에 걸면 귀걸이’ 팀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가장 많은 응원을 받았다. 강한민(46)씨와 그의 사촌 권형순(44)씨가 온몸을 금칠한 듯한 의상을 입고, 찰랑거리는 귀걸이의 마감 장식까지 표현한 디테일로 주목 받았다. 강씨는 “평소 초등 5학년 딸아이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자주 다니던 터에, 좋은 추억을 쌓고 싶어 참가를 결심했다가 내가 더 ‘과몰입’ 했다”고 말했다.
의상은 모두 직접 제작했다. 금색 래커만 7통을 썼다. 특히 귀걸이의 고리 부분을 표현한 자루 모양의 구조물은, 쿠팡에서 산 에어캡으로 모양을 잡은 후 도배풀로 한지를 붙이고 말려 래커 칠을 하는 공정을 거쳤다. 강씨는 “촬영 컨셉, 장소 등도 미리 생각해 둔 곳이 있었지만, 막상 의상을 입어보니 에어캡으로 만든 상의가 너무 더웠다”며 “옷을 입자마자 ‘절대 못 나간다’는 걸 직감한 후 집에서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일본인 3명으로 구성된 ‘인간 호작도’ 팀은 40도 가까운 여름 땡볕 아래에서 촬영하느라 더위와 사투를 벌였다. 호랑이로 분장한 쿠미(가명·30)씨도, 까치로 분한 친구 2명도 모두 바람이 잘 통하지 않은 ‘쫄쫄이’ 의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쿠미씨는 “케데헌을 본 후 호랑이가 귀엽고 재미있게 표현된 호작도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내가 느낀 매력을 일본인들에게 전달하고 싶어 친구들에게 촬영을 함께 하자고 설득했다”고 말했다.
호랑이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표현하기 위해 얼굴에 물감을 칠하는 수고도 감수했다. 쿠미씨는 “원래는 호랑이탈을 준비했었는데, 호작도 속 표정을 표현하기엔 역부족인 것 같아 촬영 당일 가까운 다이소에 가서 물감을 사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분장을 하고 나니 부끄러움도 없어지는 느낌이었다”며 “다 같이 택시 타고 국립중앙박물관 뒷뜰까지 가서 즐겁게 촬영했다”고 말했다.


‘한복미인즈’는 조선 시대 화가 신윤복의 그림 ‘단오풍정’ 속 여인들 중 4명의 모습을 표현했다. 대회 출전을 주도한 권노아(36)씨는 “평소 한복을 입기를 즐겨하는 네 명의 친구가 뜻을 모았다”며 “한 달 간 포즈를 연구한 사진을 서로 공유하며 구도를 의논했고, 촬영 당일엔 각자가 소장한 한복, 가채를 모두 동원했다”고 말했다. “네 명 중 등을 보인 채 허리 노출 컷을 찍은 과감한 모델은 남성”이라거나 “한 발을 그네에 걸친 것처럼 보이는 포즈는, 사실 그네를 고정할 지지대가 없어서 양 팔로 들고 있는 것”이라는 비밀도 귀띔해줬다.

‘재롱이와 솔솔이 연합’은 고려 시대의 금동관음보살좌상으로 분장하기 위해 머리 끝부터 상반신 일부까지를 모두 금색 래커로 칠해야 했다. 의상 제작, 사진 촬영을 담당한 ‘솔솔이’ 박한솔(32)씨는 “보살이 입고 있는 옷의 주름, 목걸이는 촬영 때 일일이 위치를 잡기 힘들 것 같아 모두 실로 한땀한땀 고정했다”고 말했다.
촬영 과정도 만만찮게 힘들었다. 박씨는 “섭외한 스튜디오가 밤 10시 이후부터 사용 가능해서 퇴근 후 6시간 동안 밤샘 촬영을 했다”며 “모델이 된 친구는 실제 직업이 포토그래퍼인데, 조명 각도를 일일이 입으로 원격 조정하며 촬영을 주도했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모두 본인이 분장한 유물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강한민씨는 “우리 팀이 분장한 황오동 귀걸이의 경우 신라 시대 다른 귀걸이보다 덜 유명하고, 일제강점기 때는 잘못된 표기 때문에 ‘노서동 귀걸이’로 불리던 시절도 있었다”며 “우리 분장 사진을 계기로 유물의 숨은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권노아씨는 “신윤복의 그림에서처럼 한복은 유행을 타기도 하고, 본인의 개성에 따라 각기 다른 디자인으로 제작되기도 한다”며 “한복이 고루한 옷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한복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의 모습을 실제로 보거나, 직접 분장을 해보고 싶다면 26일부터 3일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국중박 분장놀이’ 행사장을 찾으면 된다. 행사 기간 동안 국립중앙박물관 열린마당에서는 신라 금관, 광복, 호랑이를 주제로 한 포토존을 운영한다. 누구나 포토존을 이용하거나 전통 복장을 무료로 대여해 분장놀이에 참여할 수 있다. 박물관 관계자는 “세대와 국적을 넘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박물관 축제의 장을 만들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