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세사기와 보이스피싱에 이어 대기업을 사칭한 ‘노쇼 사기’가 기승을 부리며 피해가 확산하고 있다. 수법은 갈수록 교묘해지지만 법원의 대응과 처벌 수위가 낮아 범죄 확산을 막지 못한다는 지적이 커지고 있다.
27일 경찰에 따르면 수원장안경찰서는 화성시 병점역 인근 민간 아파트 건설 사업을 내세워 피해자 528명으로부터 계약금 85억 원을 편취한 일당을 쫓고 있다. 이들은 실제 사업 추진과 무관하게 ‘조기 계약 시 분양가를 낮춰주겠다’는 식으로 피해자들을 속여 거액을 챙겼다.
비슷한 시기 파주경찰서는 대기업을 사칭해 자재업체를 속인 ‘노쇼 사기’ 사건을 수사 중이다. 피의자는 유명 건설사의 하청을 가장해 타일 시공업자에게 수백만 원의 자재비를 요구했으나, 정작 공사 현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존 노쇼 사기가 주로 공공기관을 사칭하던 방식에서 대기업으로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이처럼 수법이 교묘하게 진화하면서 일반인뿐 아니라 업계 종사자들까지 피해자가 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거래 관행상 발주처가 대기업이라고 하면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다”며 “자재비나 착수금을 요구받으면 곧바로 지급하는 경우가 많아 사기 피해가 속출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사법부의 대응은 미흡하다는 비판이 이어진다. 수원장안경찰서 사건에서 법원이 공범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이 대표적이다. 경찰 내부에서는 “주범 추적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서 공범이 풀려나면 수사망이 새어나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경찰 관계자는 “법원이 ‘증거 인멸 가능성이 낮다’며 영장을 기각했지만, 오히려 수사에 차질을 빚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판결 수위도 낮다. 노쇼 사기 사건의 경우 피해금액이 수억 원에 달하더라도 징역 1년 내외에 집행유예로 끝나는 사례가 많다. 지난 22일 ‘더불어민주당 홍보실장’을 사칭해 숙박업소에 노쇼 사기를 벌인 20대 남성은 피해액이 2억 원을 넘었음에도 징역 1년 6개월에 벌금 700만 원을 선고받았다. 거액의 범죄임에도 징역형은 2년을 넘지 않았다.
전세사기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화성 동탄신도시에서 수백 채 오피스텔을 보유하며 세입자 보증금을 편취한 임대인 부부는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지만 항소심에서 7년으로 감형됐다.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지만 피해자들은 “피해액이 수백억 원에 이르는데 형량은 절반으로 줄었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전세사기 대책위 관계자는 “초범이라는 이유로 감형되는 경우가 잦다”며 “형을 살고 나오면 끝이라는 인식이 퍼져 또 다른 사기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피해자 상당수는 재산을 회복하지 못한 채 오랜 기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법조계 내부에서도 제도적 허점을 지적한다. 한 변호사는 “일부 노쇼 사건은 피해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기 혐의 대신 업무방해죄가 적용돼 형량이 대폭 낮아지는 경우가 있다”며 “피의자들이 어떻게 하면 법망을 피할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범죄자들이 약한 처벌을 악용해 수법을 갈수록 고도화한다고 분석한다.
홍성준 약탈경제반대행동 대표는 “주범이 실형을 받더라도 조직원 일부는 금방 풀려나 또 다른 범죄를 설계한다”며 “사법부의 미온적 대응이 신종 수법 개발의 단초가 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시민들은 전문 지식이 없어 사기에 쉽게 당할 수밖에 없다. 사기 연루자 전원을 강하게 처벌하고, 초범이라도 피해 규모에 맞는 엄중한 형량을 부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갈수록 교묘해지는 사기 수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단속과 수사에 그치지 않고, 판결 단계에서 엄정한 형벌을 내려 범죄자들이 두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 경기신문 = 박진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