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선 사업 영업기밀 유출 의혹으로 촉발된 구자은 LS그룹 회장과 김상열 호반 회장의 자존심 싸움이 재점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호반의 우군으로 분류되는 하림의 참전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면서다. 이에 LS 측도 전열을 가다듬는 한편, 대대적 주주환원 정책으로 맞선 모양새라 향방에 관심이 쏠린다.
14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하림 계열사 팬오션은 지난 5월16일 ㈜LS 주식 7만6184주(지분율 0.24%)를 주당 16만1175원에 신규 취득했다.
팬오션 측이 표기한 출자 목적은 '단순 투자'다. 다만 외부에선 하림이 'LS 흔들기'에 가세한 것으로 보고 있다. LS와 겹치는 사업 영역이 없고, 전선업이 유망하다고 해도 전문 투자사가 아닌 벌크선사가 타 기업의 지분을 매입한 것은 이례적이라는 인식에서다. 게다가 하림과 호반은 장기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일례로 2023년 하림이 HMM 인수를 추진할 당시 호반이 백기사를 자처했다.
이를 계기로 LS와 호반의 분쟁 국면이 재가열될 것으로 점쳐진다. 3월 호반의 ㈜LS 지분 약 3% 매입 소식 이후 별다른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아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 했는데, 하림이 다시 불을 지핀 격이 됐다.
LS와 호반의 불편한 관계는 자회사의 오랜 분쟁에 기인한다. LS전선은 대한전선의 부스덕트용 조인트 키트 제품이 자신들의 특허를 기반으로 설계됐다며 2019년 소송을 제기했고, 3월 항소심에서 일부 승소(대한전선이 약 15억원 배상) 판결을 받아들었다. 또 양사는 해저케이블 기술탈취 여부를 놓고도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다. 대한전선이 LS전선의 해저케이블 제조 설비 도면과 레이아웃 등을 탈취했는지 여부가 쟁점인데, LS전선의 해저케이블 공장을 설계한 가운종합건축사무소가 대한전선 충남 당진공장 건설까지 맡은 게 화근이었다. 이 건은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인데 그 결과에 따라 소송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호반이 LS 지분을 사들이자 시장 곳곳에선 상대 진영을 향한 선전포고라는 해석이 나왔다. 경영에 관여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해 국면을 전환하려는 게 아니냐는 얘기다. 상법상 발행 주식 총수의 3% 이상을 보유한 주주는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하거나 회계장부 열람권, 주주 제안권 등을 행사할 수 있다.
LS도 공세에 맞서려는 듯 대응 태세 구축에 한창이다. 지주와 그룹사의 연결고리를 공고히 하고 이익 환원을 약속하며 우호 지분 확보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투자형 지주사 인베니(옛 예스코홀딩스)가 지주사 지분을 확보한 게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지난 5일 ㈜LS 지분 1000주를 주당 16만4598원에 매입했는데, 오너일가의 경영권 강화 포석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실상 독립적으로 움직이던 인베니가 ㈜LS 주주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도 그룹사가 지주사 지분을 보유하게 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어서다.
나아가 LS는 내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자사주 100만주(지분율 약 3.1%, 1712억원 규모)를 소각한다고도 약속했다. 표면적으로 '주주환원 정책'을 이행한 것이지만, 일각에선 호반과의 분쟁 국면과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본다. 자사주를 소각할 경우 자연스럽게 발행 주식 총수가 줄어 기존 주주의 지분율을 끌어올리고 결과적으로 경영권을 안정시키는 효과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와 맞물려 주가가 상승하는 것도 LS엔 호재다. 가격 부담을 키워 상대 진영의 지분 매집에 제동을 걸 수 있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하림의 참전이 LS와 호반의 갈등 국면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지 단언하기 어렵다. 구자은 회장 등 LS 총수일가의 지분율이 32%를 웃도는 데다, 국민연금이 약 13%의 지분을 들고 있어 현 구도에서 경영권 분쟁 여부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게 재계의 중론이다.
재계 관계자는 "두 진영의 지분 격차가 상당한 수준이라 경영권 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볼 수 있다"면서 "다만 호반 측이 우호 지분을 꾸준히 늘리면 변수가 생길 수 있는 만큼 LS 차원에서도 대비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