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하얀 솜이 옹기종기 맺힌 거대한 목화밭이 짙어가는 가을을 알리는 곳. 미국 조지아주는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이며, 목화 산업을 위해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혹사했던 남부의 대표지역이다. 이곳은 2024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이른바 ‘경합 주(스윙 스테이트)’ 7곳 중 하나로 주목받았다. 1만1779표라는 근소한 차이지만 4년 전 민주당 대선후보 조 바이든의 손을 들어줬던 이곳은 왜 카멀라 해리스를 외면했을까.
미국인들은 선거철이 오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 이름이 적힌 팻말을 집 앞에 꽂아 정치적 의사를 밝힌다. 대학생이나 이민자들이 사는 아파트단지엔 드물지만, 주택가로 가면 꽤 많은 팻말이 보인다. 주도 애틀랜타(Atlanta) 도심에서 동쪽으로 1시간 반 거리인 애선스(Athens)는 1785년 문을 연 조지아대학(University of Georgia·UGA)을 중심으로 자리 잡은 소도시다. 대학도시답게 늘 민주당 지지가 높았던 이 지역 주택가 풍경이 올가을엔 조금 달랐다. 경제 상황을 반영하듯 핼러윈(10월 31일)을 맞아 화려한 장식을 두른 집들이 작년보다 눈에 띄게 줄었고, 도널드 트럼프와 러닝메이트 J. D. 밴스를 적은 팻말이 꽤 많이 보였다. 지난 2월 UGA 캠퍼스에서 조깅하다 불법 이민자에게 살해된 대학생이 살던 동네 근처는 더더욱 그랬다. 분위기가 8년 전 트럼프 당선 때를 떠올리게 한다는 말도 들려왔다.
사전투표율이 역대 최대 기록을 찍은 가운데, 선거일 직전까지 박빙을 예측하는 기사가 쏟아져나왔다. 미국은 대선 투표일이 연방 공휴일이 아니지만, 진보 색채가 강한 이 도시는 선거일 공립학교 수업을 취소했다. 일부 학교를 포함한 투표소 앞에서는 DJ가 흥겨운 음악을 틀며 민주적인 한 표를 던지러 온 발길을 응원했다.
하지만 높은 투표율이 꼭 민주당 지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애선스 토박이인 진 헤닌저(Jean Henninger)는 “사전투표에 참여했는데, 차마 트럼프를 찍을 수는 없었다. 미친(crazy) 사람이지 않나. 하지만 민주당 정책에 불만이 많아 해리스를 찍을 수도 없었다”라고 했다. 그는 결국 투표용지에 다른 이름을 적고 나왔다.
트럼프를 찍는 것이 트럼프를 좋아해서만은 아닐 수 있다. 애선스에 직장을 두고 있는 한 50대 여성은 “트럼프를 좋아하지 않는다”면서도 “해리스가 대통령이 되기엔 너무 보여준 게 없어서, 두 사람 중 한 명을 고른다면 트럼프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이미 트럼프를 알 만큼 아는 이들이 해리스를 찍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해리스가 기대도, 확신도 주지 못했다는 뜻일 수 있다. 해리스가 바이든 정부 정책과 선을 긋지도, 자신만의 정책을 보여주지도 못하는 동안 트럼프는 신나게 ‘정권심판’을 외치며 승기를 잡았다.
트럼프가 선거인단 270명을 확보한 11월 6일 아침 뉴욕타임스는 “트럼프의 승리로 미국이 불확실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Trump’s Victory Opens an Era of Uncertainty for the USA)”고 정의했다. 하지만 해리스의 당선이 더 불확실한 미래를 가져올 거라 생각한 사람도 적지 않았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게 아닐까.
<애선스(미국 조지아주) | 임소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