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어느 나라에서나 음악계의 한 해는 신년음악회와 함께 시작된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단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 단골 레퍼토리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와 폴카들이다. 새로운 해를 흥겨운 음악과 춤으로 시작하는 셈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탄생 200주년을 맞는 해라서 그럴까. 올해에는 슈트라우스 1세와 2세, 요제프와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 등 슈트라우스 가족들 모두의 작품이 빠지지 않고 연주되었다.
이들만큼 놀라운 가족이 또 있을까. 한 명이 유명해지는 것도 어려운데 아버지와 세 아들이 모두 음악으로 성공했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뛰어난 예술가이면 자녀들이 예술가로 성공하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아버지의 명성이 큰 부담이 되어서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 입장에서도 자신이 어렵게 쌓아놓은 명성을 자식이 망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 혹시 자식의 재능이 너무 뛰어나다면 아버지는 기뻐하며 그를 후원할까 아니면 그를 자신의 경쟁자로 여길까.
슈트라우스, 아들에 자기 이름 그대로 붙여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예가 슈트라우스 부자이다. 아버지는 “왈츠의 아버지”라 불리고 아들은 “왈츠의 왕”이라 불린다. 아버지의 풀네임은 요한 밥디스트 슈트라우스, 아들의 이름도 정확하게 요한 밥디스트 슈트라우스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버지 슈트라우스는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자기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2세 또는 요한 슈트라우스 시니어와 요한 슈트라우스 주니어로 그 둘을 구분해서 부른다.
이름을 똑같이 붙였으니 직업도 그대로 물려주고 싶었을 것 같지만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는 자기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것에 반대했다. 하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가 하는 모든 음악에 흥미를 보였으며 아버지의 연주 스타일을 그대로 흉내내어 연주할 정도로 음악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음악가로서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고단함을 아들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아버지 슈트라우스는 아들이 음악가가 되려는 것을 매우 싫어했으며 몰래 바이올린 연습을 하는 아들을 크게 나무라곤 했다.
실제로 슈트라우스 1세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태어났을 당시 그의 아버지는 웨이터로 일하면서 선술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어려서부터 날것 그대로의 여흥 음악을 들으며 자랄 수 있었지만, 일곱 살 때 어머니가 브루셀라증으로 사망했고 5년 후 아버지마저 사망하는 바람에 고아가 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제본 일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늘 음악이었고, 일을 하면서도 폴리샨스키라는 음악가로부터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

몇 년 후 연주를 통해 나름대로 경험과 실력을 쌓은 슈트라우스 1세는 열아홉 살의 나이로 요제프 란너와 드라하네크 형제가 결성한 4중주단에 비올라 주자로 합류할 수 있었다. 이 실내악단은 크게 인기를 얻었고 오케스트라로 규모를 키우면서 그의 위상도 따라 올라갔지만 그는 자신의 밴드를 결성하고 자기가 직접 작곡한 곡으로 승부를 거는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란너와는 경쟁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경쟁의 최후 승자는 슈트라우스였다. 그는 단정한 왈츠를 추구했던 란너와는 달리 싱커페이션을 사용한 화려한 스타일을 구가했으며 저속한 사교춤의 반주 음악이던 왈츠를 연주회용으로도 손색이 없는 예술 음악으로 격상시켰다. 그리고 이제 29세가 된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빈 최고의 춤음악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우뚝 서게 된다.
쫓기듯이 바쁜 삶이었으나 그는 비교적 일찍 가정을 이루었다. 21세의 나이에 선술집 주인의 딸이었던 마리아 안나 슈트라임과 결혼을 했고 그해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이다. 이후 아들 셋과 딸 둘을 더 낳았고 세 번째 아들이 10달 만에 사망하긴 했지만 나머지 다섯 남매는 다들 건강하게 자랐다. 큰아들 요한과 둘째 요제프는 빈의 명문 쇼텐김나지움을 나와 빈 공과대학의 상업학과에 입학했고, 요한은 회계 시험에서 1등 상까지 받으며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했다. 이러한 자식들의 존경을 배신한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였다.
무엇보다 가정에 있을 시간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란너를 이기기 위해 그는 해외 연주를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려 했고 유럽 전역을 누비며 연주 여행을 다녔다. 투어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명성은 점점 올라갔지만, 그럴수록 아내와 자식들과의 사이는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치명타는 모라비아 출신 젊은 여성 에밀리 트람푸쉬와의 불륜이었다. 이 관계는 10년 이상 길게 이어졌고 둘 사이에서 8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마리아 안나는 1844년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2년 만에 이혼했다.
아버지가 가정을 버린 것은 불행이었지만, 그 덕분에 아들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음악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요한은 18살에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했고 두 남동생도 모두 음악의 길로 돌아섰다. 아들 요한은 사실 이전부터 아버지 모르게 아버지 악단의 악장인 프란츠 아몬에게 바이올린을, 사립음악학교를 운영하던 이론가 요아힘 호프만으로부터 화성과 대위 이론을, 작곡가 요제프 드레흐슬러에게 작곡을 배우며 빠르게 기초 실력을 쌓아왔다. 덕분에 음악을 제대로 시작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시 당국으로부터 여흥 음악회를 개최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냈으며, 프리랜서 음악가들을 24명이나 끌어들여 자신의 오케스트라도 꾸렸다.
문제는 이들 부자의 껄끄러운 관계를 잘 아는 공연장들이 당시 영향력이 대단했던 슈트라우스 1세의 눈치를 보느라 슈트라우스 2세에게는 대관을 꺼렸다는 것. 다행히 히칭 교외의 도마이어 카지노가 대관을 해주어 아들 슈트라우스는 작곡가 겸 지휘자로서 간신히 데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슈트라우스 1세는 아들이 과거 자신이 공연하던 곳에서 데뷔하는 것을 자신에 대한 도전과 배신으로 받아들였고 다시는 그곳에서 공연하지 않겠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아들 슈트라우스는 이날 공연에서 마이어베어, 오베르, 주페의 음악 뿐 아니라 자기 아버지의 작품 한 곡과 자신이 작곡한 음악 4곡을 초연했다. 이에 대한 청중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으며 평론가들도 젊은 슈트라우스에게 열광적인 찬사를 쏟아 냈다. ‘Der Wanderer’지의 한 평론가는 “이제 슈트라우스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훌륭하게 계승될 것이다”라고 예언했고 이 말은 훗날 그대로 실현되었다.
아버지는 ‘왈츠의 아버지’ 아들은 ‘왈츠의 왕’

하지만 당장은 성공적인 데뷔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아버지가 장악한 빈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외곽과 지방을 돌며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부자간 대립은 1848년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 시민 혁명의 불길이 타오를 때 더욱 격렬해진다. 아버지는 군주제를 지지하고 아들은 혁명파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가 그 유명한 ‘라데츠키 행진곡’을 작곡한 것이 바로 이때이다. 한편 이 시기 아들 요한은 지금의 프랑스 국가이자 프랑스 대혁명 시기 대표적인 혁명가였던 ‘라 마르세예즈’를 공개적으로 연주해서 빈 당국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부자간 치열했던 경쟁은 이듬해인 1849년 아버지 슈트라우스가 45세의 나이에 성홍열로 사망하는 바람에 갑자기 중단되었다. 그 후 20대의 아들 슈트라우스는 뛰어난 음악성과 열정으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거침없이 자유롭게 열어갔다. 그는 아버지가 확립한 왈츠 형식에 도입부에서 코다에 이르는 유연한 흐름을 더했으며, 아름다운 관현악법과 풍부한 선율, 주제의 정확한 대비와 다채로운 리듬 형태를 추구함으로써 왈츠의 세련미를 더 끌어올렸다. 수많은 그의 작품들이 지금까지 즐겨 연주되고 있으며 특히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오스트리아의 비공식 애국가라 할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다.
둘 다 크게 성공했지만, 부자간에 죽기 전까지 경쟁만 하다가 끝내 화해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다. 자식이 나보다 잘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 보통 부모의 마음인 줄 알았는데, 1등이 모든 것을 가지는 승부의 세계에서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어릴 때 불렀던 졸업식 노래처럼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면서’ 같이 성공하는 모습들을 더 많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독재자와 음악’‘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