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어버리는 기술을 익히기란 어렵지 않다/많은 일이 언젠가는 잃을 의도로 가득해 보이니/상실이 꼭 재앙은 아니다.”(‘한 가지 기술’ 일부)
1911년 2월 태어나 그해 10월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그가 다섯살 때 병원에 입원해 사망 때까지 20여 년을 병원에서 보냈다. 이후 다른 가족의 손에 맡겨지다, 자신의 ‘진정한’ 집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20세기 미국의 대표시인 엘리자베스 비숍(1911~1979)의 생애다.

상실이 깊게 패어 있을 것만 같은 삶이다. 그러나 비숍은 “상실이 꼭 재앙은 아니”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집 『지리Ⅲ』(1976)에서다. 그 문장의 울림은 비숍의 삶을 들여다보아야만 느낄 수 있다.
시는 공백을 읽는 장르다. 국내 독자들이 영시(英詩)를 만나려면 번역가와 편집자는 시의 첫 독자가 되어 공백 속 시인의 삶과 의도를 읽고, 한국어로 재조립해야 한다.

이주혜 번역가는 에이드리언 리치(1929~2012)의 산문집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2020)를 번역하며 비숍을 알게 됐다. 리치는 이 책에서 사후 드러난 비숍의 레즈비언 정체성을 기반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확장 비평한다.
리치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여성 시인이자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운동가이며, 비숍은 그보다 먼저 작품활동을 시작한 선배 시인이다. 1956년 퓰리처상, 1970년 전미도서상을 수상했고 여성 시인 최초로 하버드대 교수로 문학을 가르쳤다. 화려한 경력에 비해 한국에선 생소한 시인이다.
소설가이기도 한 이주혜 번역가는 첫 장편소설 『자두』(2020)에 리치와 비숍의 관계를 녹여냈다. 이 책으로 비숍을 알게 됐다는 독자도 많았다. 강 편집자는 “비숍은 이미 유명한 시인이지만, 한국 독자에겐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번역·소설을 통해 비숍을 꾸준히 다뤄 온 이주혜 번역가께서 옮겨주신다고 했을 때 무척 기뻤다”고 전했다.
둘은 매기 도허티의 논픽션 『동등한 우리』(위즈덤하우스, 2024)로 합을 맞춘 적 있다. 강 편집자는 “작품을 가장 먼저 읽는 독자이자 원고를 엮는 최소단위의 공동체로서, 우리가 비슷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고 전했다.

미국 비숍의 시 전집은 『Poems』란 제목으로 2011년 출간됐다. 2025년에 비숍의 책을 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 “올해는 한국의 페미니즘 대중화 흐름을 일컫는 ‘페미니즘 리부트’ 10주년이다. 그 10년간 미국의 페미니즘 제2 물결을 주도한 여성 활동가이자 작가들의 책이 연쇄적으로 번역됐다. 이 책도 독자의 요구에 따라 나온 셈이다.”(이주혜)
비숍의 시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장소’다.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州)부터 미국 플로리다·브라질·미국 보스턴 등지를 떠돈 비숍은, 부유하는 감각을 토대로 시를 썼다.
그러다 충동적으로 떠난 남미 여행에서 동성 연인 로타 소아리스를 만나 브라질에 17년간 머물게 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정확성과 절제를 시의 미덕으로 삼았던 그의 시가 더 솔직해진다. 이후 비숍은 하버드가 위치한 보스턴에서 지내다 사망했다. 시 전집엔 메모에 가까운 미발표 시까지 수록됐지만 400쪽 남짓. 완벽주의적 성격 때문에 과작(寡作) 시인으로도 불린다.

이 번역가는 “비숍은 어려운 표현을 쓰진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시구인 ‘눈물을 심을 시간이란다’(‘세스티나’ 일부) 역시 ‘Time to plant tears’라는 간단한 표현들로 이뤄져 있다”며 “오히려 단순한 표현을 파헤치려니 어려웠다. 시쳇(時體)말로 비숍이란 사람을 ‘캐릭터 해석’하는 과정이 중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강 편집자가 비숍 시 전집의 이름으로 “우리는 내륙으로 질주한다.”(‘상투스에 도착’ 일부)라는 시구를 추천한 이유와도 연결된다. 이 번역가는 “‘We are driving to the interior.’라는 문장을 놓고 번역을 고민했다. 그러다 ‘are driving’을 '질주한다'로 번역하니 ‘내면’, ‘내부’가 아닌 ‘내륙’이 자연스럽게 붙었다”고 설명했다. “비숍은 절제된 표현을 하는 내향적인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급진적인 시를 쓴 열린 사람이고, 집을 바라면서도 끊임없이 여행하는 사람이었다. 이 구절이 비숍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곱씹을수록 그 생각이 맞는다고 느낀다.”(강소영)
이주혜 번역가는 비숍 시 번역과 자신의 소설 작업을 함께했다. 지난 22일엔 평범한 40대 여성들이 무주로 여행을 다녀오는 이야기를 다룬 장편소설 『여름철 대삼각형』(민음사)을 출간했다. 시공간을 오가며 번역과 창작을 병행한 그가 여성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태도는 한결같다. 외롭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비숍이 “눈물을 심자”고 말했듯 그다음의 시간을 열어둔다는 것.
이들의 다음 계획은 소박하다. “비숍의 시를 만나 본 독자들의 감상이 듣고 싶다. 마음에 들어온 시가 무엇인지, 왜 그런지 우리에게 꼭 알려주시면 좋겠다.”(강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