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등에서 운행 중인 고속열차를 보면 앞부분 모양이 꽤나 다양합니다. 흔히 ‘오리 주둥이’이라고 부르는 형태도 있고, 새의 부리를 연상시키는 모습도 있는데요. 우리나라의 KTX-산천은 토종물고기인 산천어를 모티브로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고속열차 앞부분의 디자인이 제각각인 이유는 뭘까요. 국내 유일의 고속열차 제작사인 현대로템에 문의했더니 “국가마다 나름의 디자인 콘셉트가 있다”라는 답변이었습니다.
고속열차를 디자인할 때는 발주처가 원하는 형상을 제시하기 전에 미리 고속열차 전문 디자이너가 프로젝트 콘셉트에 맞는 차량 디자인을 한 뒤에 발주처와 소통하며 조끔씩 바꾸는 과정을 거친다는 설명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프랑스는 반드시 콘셉트 디자인 형상을 먼저 정해놓고 거기서 소음이나 공력, 저항 등을 따져가며 디자인을 차츰 수정한다고 하는데요. 중국과 일본의 고속열차가 지닌 독특한 모양도 그 나라의 디자인 콘셉트로 봐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각기 독특한 디자인을 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오리 주둥이’는 일본의 고속열차인 신칸센에서 볼 수 있는데요. 앞부분이 부리처럼 길쭉하기는 하지만 위로 올라오면서 마치 오리의 콧구멍을 연상시키는 뭉툭한 모양을 하고 있어 그렇게 불립니다.
열차업계에 따르면 오리 주둥이를 한 고속열차가 등장한 것은 터널과 연관이 깊은데요. 일본에선 터널 관련 세부 항목에 ‘미기압파’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고속열차가 터널을 들어가고 나올 때 순간적으로 소음과 진동을 밖으로 뿜어내는 것을 미기압파라고 합니다.
이 미기압파가 강하면 “쾅”하는 굉음과 함께 상당한 진동이 생기는 탓에 인근 민가와 축사 등에 피해가 크다고 하는데요. 사람도 힘겹지만, 가축이 놀라서 폐사하거나 여러 부작용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 ‘터널 소닉붐’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현상인데요. 터널 출구에서 나는 폭발음이 마치 제트기가 음속을 돌파할 때 발생하는 소리(소닉붐)와 비슷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고 합니다.
일본은 터널 수도 적지 않지만, 고속선로 인근에 민가가 가까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부리 위의 뭉툭한 콧구멍 부분이 미기압파를 골고루 분담함으로써 소음과 진동을 최소화하도록 디자인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양을 하면 공기저항이 증가해 상대적으로 속도나 에너지 효율 면에서 손해를 본다고 하네요. 터널이 넓으면 미기압파를 보다 줄일 수 있지만, 일본은 상대적으로 터널 단면적도 좁은 편이라고 합니다.
신칸센에 오리 주둥이를 한 고속열차만 있는 건 물론 아닙니다. 우리의 KTX와 비슷하게 앞부분이 다소 뭉툭하거나 새 부리 형상을 한 열차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길쭉하고 날카로운 새 부리 형상은 어떤 이유일까요. 중국에서 특히 많이 볼 수 있는 모습인데요. 땅이 넓고, 선로 길이도 워낙 길어서 속도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현대로템 관계자는 “속도를 높이려면 새 부리 형상이 유리한 건 맞다”며 “아무래도 낮은 유선형 형태가 바람의 저항을 덜 받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앞부분이 무조건 길다고 해서 좋은 건 아니라고 하는데요. 열차는 속도뿐만 아니라 안정성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정면뿐 아니라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고려해야 하는데 앞부분이 너무 길어지면 측풍에 약해져 주행 안정성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또 기존 철도역의 플랫폼 길이를 고려해 차체 길이를 다른 열차와 비슷하게 가져간다고 가정하면 앞부분이 길어진 만큼 승객들이 탈 좌석은 줄어드는 문제도 있다고 하네요. 역시나 중국의 고속열차도 새 부리 외에 다양한 모양이 있습니다.
여기서 혹시나 우리나라도 터널이 많은데 고속열차의 앞부분이 상대적으로 짧은 형태로 문제는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을 텐데요. 사실 우리나라도 고속철도를 건설할 때 이른바 ‘터널 소닉붐’ 감소에 꽤 공을 들였다고 합니다.
우선 현재 운행하는 우리 고속열차는 터널 진입 때 압력 저항계수 기준을 충족하도록 설계했으며 굳이 새 부리 형상까지 안 하더라도 충분히 안정성이 있다는 게 현대로템 측 설명입니다.
또 우리나라는 터널을 건설할 때 상대적으로 넓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철도건설을 총괄하는 공공기관인 국가철도공단의 박진용 궤도토목처장은 “일본은 터널 단면을 상당히 좁게 만들었지만 우리는 터널 소닉붐을 고려해 그것보다 여유있게 건설해 왔다”고 말합니다.
터널 소닉붐을 줄이기 위해 터널 입구에 소음 저감용 후드라는 구조물을 설치하기도 하는데요. 국내에서는 10여년 전에 호남고속철도 정읍 부근에 처음 설치됐다고 합니다.
지난 2020년에는 일반적인 소음 저감용 후드보다 성능이 월등한 ‘상어 생체모사형 터널 미기압파 저감 후드'를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의 연구진이 개발해 화제가 됐는데요. 기존 후드의 소음 저감 효율이 50% 안팎이지만 이 후드는 80%를 넘어섭니다.
상어가 빠르게 헤엄칠 때 입으로 들어오는 바닷물의 압력을 줄이려고 양쪽으로 아가미를 벌리는 모습에서 착안해 개발됐다고 하는데요. 미국과 일본, 독일, 중국 등 4개국에서 국제특허등록도 했습니다.
이달 30일에 개통하는 중부내륙고속철도 2단계 구간(충주~문경)에 있는 2개 터널에 이 후드가 설치됐다고 합니다. 실제로 기대한 효과를 발휘하게 되면 더 많이 활용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