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의 독도 민간인 학살을 기억함

2025-05-25

1948년 6월8일 사전통보도 없이

미군, 폭격 후 기관총으로 난사

생존자 “150명 이상 숨져” 증언

새 정부는 ‘학살’ 진상 규명해야

독도에 발을 디딘 관광객들은 감격에 겨워 모두 애국자가 된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다짐을 하고 태극기를 흔들다 떠나간다. 그런데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사실 말고 우리가 독도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일까? 수백년 동안 조업을 하며 독도를 지켜낸 것은 거문도 등의 전라도 섬사람들이란 사실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러니 독도에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은 더더욱 금시초문일 것이다.

독도만이 아니다. 한국전쟁 중에는 여수의 섬에서도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1950년 8월3일 미군 전투기가 안도 인근 해상에서 부산을 출발해 제주도로 향하던 피란선을 기총 사격했다. 이로 인해 승선자 250여명 중 200여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같은 해 8월9일 여수의 횡간도 해상에서도 미군이 조기잡이 어선 250여척을 향해 기총 사격해 어부 20여명이 학살당했다.

그런데 독도에서는 전쟁 중도 아닌데 미군의 폭격으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이 폭격은 미군이 한국인을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고 사냥감으로 취급했다는 뜻이다. 그 증거가 안용복기념관의 ‘독도조난어민위령비’에 새겨져 있다.

1948년 6월8일 미군은 사전 통보도 없이 독도를 타깃으로 폭격 연습을 시작했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미 공군 제93중폭격비행단의 B29 폭격기 20대가 독도 주변 해상에 무차별 폭탄을 투하했다. 이 폭격으로 독도 앞바다에서 미역을 채취하고 조업하던 울릉도와 강원도 어민들이 집단으로 학살당했다.

사건 발생 후 미 군정청은 어선 11척이 파괴되고 어민 14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조업 중이던 어선이 30여척이었고, 사상자도 150명이 훨씬 넘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생존 어부들은 “30여척의 동력선에 한 척당 5~8명이 승선했으니 150명 이상 숨졌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당시 독도는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제1778호(1947년 9월16일)에 의해 주일 미 공군의 폭격 연습지로 지정돼 있었다. 미군정청은 의도적이 아니었다고 변명했지만 30여척이나 조업을 하는데 미군 조종사들 눈에 어선들이 보이지 않았을 까닭이 없다. 표적 사냥을 자행한 것이 명확하다. 묻혀버릴 뻔했던 미군의 무자비한 살육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사건 다음날인 6월9일 독도로 조업을 나온 어민들에게 구조된 장학상씨(당시 36세·1996년 사망) 등 목격자 덕분이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어선들은 조업하고 일부 어민들은 미역과 해산물을 채취하면서 점심 식사를 준비하다 독도로 접근하는 한 무리의 비행기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군이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모두 4차례에 걸친 폭격과 총격으로 어민들 대다수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미국은 처음 폭격 사실 자체를 부인하다 6월17일이 되어서야 폭격을 시인했다. 7월9일 미 군정청은 소청위원회를 구성해 피해 내용을 조사했고, 1명을 제외한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완료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하며 사건은 덮어지고 말았다.

진상 규명도, 피해 배상도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덮어지자 강원도와 울릉도 주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그러자 한국 정부는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1950년 6월8일, 독도 동도의 몽돌해안에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세웠다. 당시 위령비 제막식에는 조재천 경상북도 도지사와 해군 의장대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학살이 조난이라니 어불성설이 아닌가. 우리는 미국의 눈치를 보며 학살을 학살이라고 말하지도 못하는 참혹한 시대를 살았다. 비석은 1959년 유실됐고 2005년 경상북도가 독도 동도에 다시 세웠다. 원래 비석은 2015년 바다에서 발견돼 안용복기념관에 보관되고 있다.

울릉도 주민들은 매년 6월8일 독도에서 희생 어민 위령제를 지낸다. 기상이 나빠 독도 접안이 어려우면, 안용복기념관 앞에서 위령제를 지낸다. 다시 그 학살의 날이 돌아온다. 새 정부는 미군에 의한 독도 양민학살 사건의 진상을 다시 규명해야 마땅하다. 조난자위령비도 ‘미군 폭격 희생자 위령비’로 다시 세워져야 한다. 수백년 전 일본의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 땅이란 문서를 받아냈던 어부 안용복의 후예인 우리 어민들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주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바로 세우고 독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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