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아이칸마저 "더이상 그린메일 없다"

2024-11-19

미국선 사라진 기업사냥꾼

경영권 방어에 웃돈 준 디즈니

소액주주에 수천만달러 보상

◆ 행동주의펀드 일탈 ◆

'기업사냥꾼'으로 유명한 칼 아이칸은 2012년 뉴욕에서 개최된 행동주의펀드 투자강연에서 "(만약 그린메일 전략을 쓴다면) 소송당할 것을 대비해야 한다"며 "더 이상 그린메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미국에서 그린메일을 과거와 달리 강도 높게 제재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장면이다. 아이칸은 1980년대에 수많은 그린메일을 성공시키며 기업사냥꾼으로서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그린메일의 위험성에 대해서 강조한 것이다.

그는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을 가해 높은 값에 지분을 팔아 치우는 일을 반복해 막대한 수익을 거뒀다. 당시에는 미국도 그린메일을 방어할 수단이 마땅치 않아 많은 기업들이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1982년 마셜필드 백화점을 시작으로 걸프&웨스턴, 심플리시티, 아메리칸 캔 등이 아이칸의 그린메일 표적이 됐다. 작게는 수백만 달러에서 많게는 1000만달러 이상의 수익을 가져다준 투자들이다.

1985년에 칼 아이칸은 석유회사 필립스에 경영권 위협을 가했다. 당시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아이칸은 이를 철회하는 대신 5000만달러의 수익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화려한 이력을 갖춘 아이칸이었지만 이후 전략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미국 경제매체 포브스는 2012년 아이칸이 행동주의펀드 전략 강연에서 그린메일을 뺀 것을 주제로 별도의 기사로 다룰 정도였다.

아이칸 외에도 분 피컨스, 제임스 골드스미스 등이 그린메일로 천문학적 수익을 거둬가자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제도적·사법적 제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린메일의 요건을 규정하고 이에 해당 시 이익의 50%에 달하는 세금을 부과하는 연방 세법 5881조가 대표적이다.

주별로 그린메일을 규제하는 법령을 도입한 사례도 있다. 뉴욕주에서는 회사가 주주로부터 시장가보다 높은 가격으로 10% 이상의 주식을 매수하는 것을 금지한다. 오하이오주에서는 경영권 참여를 목적으로 주식을 매입한 주체가 18개월 내 주식을 처분하는 것이 금지돼 있다. 또한 오하이오주와 펜실베이니아주 등에서는 그린메일을 통해 취득한 이익에 반환을 요구하는 조항이 있다.

그린메일로 피해를 입은 주주들이 법정공방 끝에 보상금을 받아낸 일도 그린메일이 사라지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1984년 월트디즈니사는 기업사냥꾼인 솔 스타인버그의 경영권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회사 주식을 비싼 값에 매입했다. 디즈니 주주들은 이를 그린메일이라 비판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1989년에 1심 재판이 진행되던 중 월트디즈니사와 솔 스타인버그는 주주들에게 4500만달러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합의 없이 판결이 나왔다면) 그린메일에 관한 기념비적인 첫 판결이 될 수 있었다"며 양측의 합의가 그린메일을 억제하는 효과를 낼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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