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낳은 무선호출기(삐삐)와 소형무전기(워키토키) 폭발 사건으로 인해 세계가 오랫동안 두려워하던 공급망 위협이 현실로 다가왔다는 지적이 나왔다.
워싱턴포스트(WP)는 19일(현지 시간)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 대원들이 사용하는 호출기와 무전기를 폭발시킨 공격은 정교하고 냉정한 적으로부터 현대 전자제품의 공급망을 보호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조명한다”고 지적했다.
이 매체는 전문가들을 인용해 “이스라엘의 공격이 규모나 사상자 수에서 스파이 활동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이라며 “다른 정부도 이런 방식으로 가전제품을 조작할 위험은 낮다”고 짚었다. 그러면서도 레바논을 향한 공격은 전자기기가 고도화되고 글로벌 공급망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최악의 시나리오를 현실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 전 정책 책임자였던 마크 몽고메리는 WP에 “이번 사건은 우리가 우려해온 위험의 종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이번 사건에서 폭발한 헤즈볼라 호출기의 정확한 출처는 밝혀지지 않았다. 호출기에는 대만 제조업체인 골드 아폴로사의 브랜드명이 새겨져 있지만 이 회사는 이 호출기가 “형가리 회사인 ‘BAC 컨설팅 KFT’에서 전적으로 처리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헝가리 정부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헝가리에는 이 회사의 제조 공장이 없다고 밝혔다. 미국 경제·혁신 정책 싱크탱크인 정보혁신재단(ITIF)의 부사장 다니엘 카스트로는 WP에 “글로벌 마켓플레이스에서는 무언가의 출처를 정확히 파악하기 정말 어려울 때가 있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최신 전자기기의 제작에 수십 개의 국가와 수많은 부품 공급업체와 계약업체, 하청업체가 관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다.
제조 과정이 아니라 배송 과정에서 가로채서 개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WP는 전 국가안보국(NSA) 계약직 직원이었던 에드워드 스노든이 2014년 폭로했던 기밀 문서에는 NSA 직원들이 미국 네트워크 공급업체인 시스코 시스템즈에서 배송된 전자 기기를 몰래 가로채는 비밀 창고에 대해 묘사돼 있었다고 지적했다. 실제 스노든은 화요일 자신의 X(옛 트위터) 계정에 “10년이 지났지만 배송 보안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번 호출기 폭발 테러로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덜 안전해졌다”고도 덧붙였다.
WP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국 및 기타 국가들이 자국 또는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과 함께 핵심 기술을 더 많이 국산화하려는 정치적 노력을 가속화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비즈니스 리스크 컨설팅 업체 크롤의 공급망 전문가인 마이클 와트는 “이번 사건은 각국 정부가 자국의 세관 통제에 허점이 없는 지를 돌아보게 하는 경각심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며 “각국 정부가 자국 항구를 드나드는 소비재 선적에 대한 검사를 강화하기 시작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현재 국제 무역에서 대부분 소비재가 별다른 조사 없이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모든 상품을 추가 검사해야 한다면 공급망에 추가적인 병목 현상이 발생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