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총선시민연대에 참여하면서 시민운동에 첫발을 들였다. 특정 후보자의 낙선을 촉구하는 이 운동은 당시 ‘바꿔!’ 열풍을 불러오며 반향을 일으켰다. 이듬해 참여연대에 들어가 정치개혁·국회감시·검찰감시·사법개혁 등 권력감시 활동을 했고, 2022년 사무처장에 임명됐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전까지는 ‘거부권을 거부하는 전국비상행동’ 공동운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 공동위원장으로, 매주 탄핵 촉구 집회 기획·준비에 힘을 보태고 있다. — 2024년 12월은 무장한 계엄군을 맨몸으로 막아낸 시민들이 있어서, 광장에서 함께 노래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12·3 내란 이후 시민들은 색색의 응원봉으로 광장을 덮었으며,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다만세)’, 지드래곤의 ‘삐딱하게’ 같은 K팝을 떼창했다. 축제를 방불케 하는 집회 풍경은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마침내 국회는 지난해 12월14일 ‘내란 수괴’ 윤석열의 직무를 정지시켰고, 탄핵심판대에 세웠다. 법원은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그러나 내란은 현재진행형이다. 피의자 윤석열은 관저에 숨어 버티기에 들어갔고, 여당인 국민의힘은 책임을 지기는커녕 내란 수괴를 비호하고 있다. 직무 정지된 피의자가 사법처리에 저항하고, 그 권력이 아직도 버젓이 내전을 선동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폭설 속에서 “누구라도 여기에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며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을 지킨 ‘키세스 시위대’의 물음도 같을 것이다.
위기에 빠진 한국 사회의 희망은 목숨 걸고 민주주의를 지키고 있는 시민뿐이다. 윤석열 탄핵안 가결 직후 국회 앞 탄핵 촉구 집회에서 사회자로 무대에 올라 “국민이 승리했다”고 외친 이지현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지난 13일 경향신문에서 만났다. 이 사무처장은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 공동위원장으로 집회 운영을 맡고 있다. 그는 “광장은 뜨거웠고 연대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며 “평소 배제되던 수많은 소수자들이 무대에 올랐고, 공감하며 위로하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청년들과 기성세대가 서로를 배려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사고 없이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고도 했다. 우리는 이번에야말로 다른 세계로 갈 수 있을까? 이 사무처장은 “내란 사태로 민주주의는 완전무결하지 않고, 늘 부단히 노력해야 함을 다시금 깨달았다”며 주권자로서 시민 역할을 강조했다.
플레이리스트 신청에 2만건 훌쩍
젊은 세대는 ‘민중가요 틀어달라’
기성세대는 ‘K팝 배우고 싶다’
서로에 대한 배려, 집회문화 정착
가장 신경 쓰는 건 참가자들 안전
소수자 차별·배제 발언 없게 신경
이렇게 축제같은 집회는 처음
오래 기억에 남을 경이로운 장면
연대의식 깨어졌다 생각했는데
윤석열 탄핵집회 통해 희망 발견
왜 남성들은 없느냐고 묻기보다
함께 만들어가자고 제안해야
윤석열 탄핵 집회는 ‘집단의 힘’으로 연출
- 2차 탄핵안 투표가 있던 12월14일, 국회 앞 집회에서 사회를 보셨는데요.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요.
“지금까지 시민들이 그렇게 많이 모인 적은 없었어요. 주최 측이 200만명으로 발표했는데, 시민들이 가득 차 있어서 무대에서 끝이 보이지 않았어요. 윤석열 탄핵소추안 2차 표결 결과를 발표하는 순간엔, 다들 숨죽이고 있었죠. 우원식 국회의장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의사봉을 두드리자마자 환호성을 지르고, 눈물 흘리고 난리였습니다. 저마다 다른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일주일여 만에 한자리에 모여서 한마음으로 이렇게 기뻐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제가 ‘국민이 승리했다. 대통령은 44년 전으로 시계를 되돌리려 했지만 깨어 있는 우리 시민들이 민주주의와 헌정 질서를 지켜냈다’고 외쳤는데, 그 전에 다들 붕 날아오르더라고요.”
- 이번 집회는 과거와는 다른 풍경으로도 화제였습니다. 촛불 대신 응원봉이 빛나고, K팝 떼창에 맞춰 구호가 이어졌는데요. 외신들도 “축제 같았다”며 한국의 집회 문화를 조명할 정도였습니다.
“비상행동에 기획팀이 있는데요. 다들 ‘이번 집회는 기획팀 연출이 아니라 집단의 힘으로 연출된 것이다’라고 해요. 주최 측은 긴 시간 집회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고민 많이 했어요. 12월7일엔 1차 탄핵안 표결이 무산되고 현장 분위기가 무거웠어요. 그때 기획팀장이 본인 노트북에 있던 K팝 음악을 틀었어요. 에스파 ‘위플래시’, 로제 ‘아파트’ 등이 이어지자 분위기가 일순간에 달아올랐죠. 응원봉을 든 시민들이 앞으로 나와 목이 터져라 노래를 따라 부르고, 굉장히 즐겁게 즐기시는 거예요. 그래서 젊은 세대가 그들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데 참여하고 있다는 걸 더 알리고 싶어 플레이리스트 신청을 받았어요. 상황실로 2만개가 왔어요. 모든 세대가 다 만족할 수 있도록 엄선해서 탄핵송 플레이리스트까지 만들게 됐고요. 2030 세대들은 ‘민중가요나 중장년 음악도 많이 틀어달라, 가사만 알려주면 따라 부르겠다’고 했고, 기성세대들은 K팝 노래를 배우고 싶어 했어요. 서로에 대한 배려가 세대를 통합하는 집회 문화를 정착시킨 것 같습니다. 응원봉 대신 몸에 꼬마전구를 두르거나 스탠드를 들고나온 분들도 있었어요. 각자 꺼지지 않는 촛불을 들고나왔단 생각이 들어요. 재치있는 깃발들도 많았는데요. 해학도 있고 재치도 더해지니까 집회가 재밌어졌어요.”
- 집회에선 2030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졌습니다.
“새삼스러운 면도 있어요. 청년 여성들은 ‘이전에도 우리는 광장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2018년 미투 운동과 불법촬영 규탄 혜화역 시위 등 여성 관련 의제가 불거지면 여성들은 언제나 광장으로 나왔어요. 그저 조명되지 않았을 뿐이죠. 무엇보다 윤석열 정부에서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며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려고 하고, 여성 폭력·혐오에 대해 등한시하는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쌓였던 분노들이 터져 나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 언론과 정치권이 여성들의 정치 참여에 주목하자 “성별 갈라치기를 하지 말라”는 적대적인 반응도 있던데요.
“젠더 갈등을 부추기면서 그런 프레임을 만드는 것은 굉장히 나쁜 시도입니다. 현장에 2030 여성들이 많긴 해요. 그 이유를 유추해 보자면, 여성들은 저마다의 문제로 행동하고 연대했던 경험들이 그동안 쭉 쌓였어요. 상대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남성들은 연대해야 할 필요가 덜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래도 지금 ‘왜 남성들이 없냐’고 묻기보다는 ‘안전하고 재미있는 집회를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자’ 이런 제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등하고 민주적 집회 ‘참여자 약속’
- 집회 운영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지금 윤석열 퇴진 운동을 주도하는 연대체는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입니다. 전국 1700개 시민·사회·노동 단체가 참가하고 있고, 운영위원회에서 매주 토요일 집회를 계획합니다.”
- 특히 신경 쓴 부분은 뭔가요.
“첫 번째는 안전 문제예요. 밀집되지 않게 신경 많이 쓰고요. 워낙 날씨도 춥고 하니까 현장에 의사·간호사 단체에서 나온 분들이 상주해요. 그다음에 변호사 단체는 충돌 등을 대비해서 법적인 공지도 하고 인권 침해 감시단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평등하고 민주적인 집회입니다. 매번 집회 현장에서 ‘집회 발언 시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청소년, 이주민 등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긴 ‘평등하고 민주적인 집회를 위한 참여자 약속’을 반복해서 안내합니다. 최근엔 현장에서 일회용품이 너무 많이 나와서 손팻말을 재활용할 수 있도록 반납 창구를 만들었어요. 집회가 계속 진화하고 있어요.”
- 연예인들도 간식 등을 선결제하며 힘을 보탰습니다. 그런데 탄핵 집회를 후원한 연예인이나 문화계 인사들에 대한 공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가수 이승환씨 구미 공연은 취소되기도 했습니다.
“이승환씨는 경북 구미시장이 ‘정치적 선동 금지’ 서약서를 쓰라고 했다는 거잖아요. 과거 군부독재 때나 가능했던 일을 어떻게 지금 요구할 수 있을까 충격을 받았거든요. 연예인들도 그렇고 교사·공무원도 마찬가지로 시민의 한 사람입니다. 당연히 자신의 기본권은 보장받아야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죠. 이승환씨는 헌법소원을 청구한다고 들었어요. 공권력이 무대에서 공연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검열하고 입을 막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 전봉준 트랙터 투쟁단이 경찰의 차 벽을 넘어 관저까지 가게 된 데에는 시민의 힘이 컸습니다. ‘남태령 대첩’이라고도 하는데, 경찰의 집회·시위 관리 어떻게 보십니까.
“현행법이 집회·시위를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로 운영하는 이유는 당국의 보호·지원을 받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런데 경찰이 시위의 방식·장소 혹은 교통 소통을 이유로 집회를 막는 것은 자의적인 판단이죠. 신고제는 허가를 구하는 절차가 아닌데 경찰이 그 의미를 착각하고 있어요. 집회는 필연적으로 교통 방해 같은 걸 동반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민주사회에서 감수해야 되는 일이고, 법원도 헌법재판소도 판단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남태령 대첩, 전장연 집회로 이어져
- 여성, 청소년,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등 소수자들이 기존 집회에서 핍박받으면서 느꼈던 고립감을 남태령 대첩에서 해소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이미 겪은 차별에 대한 감각으로 연대감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고 하던데요.
“‘남태령 대첩’에 힘을 보탰던 시민들이 일주일 만인 12월28일 서울 종로구 향린교회에서 뒤풀이를 했어요. 사전 신청을 받았는데 반응이 뜨거웠어요. 시민 대부분은 그날 남태령에 달려간 이유로 ‘농민들이 폭력을 쓰는 것도 아니고 당장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닌데 행진을 막아서’라고 했어요. 비상계엄 때 국회를 지켰던 시민들에 대한 부채감이 컸다는 이들도 많았어요. 광장에 모여 시위를 해도 힘을 발휘할 수 없었던 소수자들은 ‘자신들을 억압했던 경찰 공권력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면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대단한 것은 남태령 대첩이 전장연 집회 참여로 이어지고 장기 투쟁 사업장의 후원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들 얼떨떨해합니다.”
- 관저 앞에서 윤석열 체포영장 집행을 촉구하는 집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추위와 눈보라도 막지 못할 ‘키세스 시위대’가 출현했고요.
“현장 활동가들이 이렇게 먹거리가 많은 집회는 본 적이 없다고 해요. 김밥·빵·소시지·어묵·초코파이 등 종류도 다양합니다. 함께하지 못한 시민들은 난방버스나 푸드트럭을 보내주며 힘을 보탭니다. 화장실엔 여성 위생용품도 구비돼 있어요. 주변 성당과 미술관은 쉴 수 있는 공간을 내줬고요. 수도원에서 화장실을 개방해줬는데 이용하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돌아가면서 청소도 하고, 휴지통도 비우고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화장실을 사용하는데도 지저분한 줄 모르고 사용할 수 있는 것도 다 시민들 덕입니다. 오래 기억에 남을 경이로운 장면입니다.”
- 약 한 달간 집회를 지켜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뭔가요.
“연대 의식이죠. 그동안 한국 사회는 각자도생하느라 연대 의식이 많이 깨져 있다고 생각했어요.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만 해도 연대 의식을 어떻게 하면 복원하고 강화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사라진 게 아니더군요. 광장에서 희망을 봤습니다.”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 내란 우두머리 체포 과정은 뜻밖에도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법조 엘리트와 고위 관료들의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권자로서의 시민들의 역할은 뭘까요.
“이번 사태로 굉장히 어렵게 쟁취한 제도나 권리들조차도 시민들이 지켜내지 않으면 쉽게 후퇴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완성된 게 아니라 시민들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유지해 가는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이번에 무도한 자에게 권력을 내어주었을 때 국가 시스템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경험을 하고 있잖아요. 그래도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 시민들이 튼튼한 기초 체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확실히 알았다는 게 위안이 돼요. 앞으로 서로 연대하면서 주권자로서 권력에 대해 끊임없이 감시하고, 선거 때는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죠.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진 않고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 광장에 함께 있지 못했지만, 불법 계엄과 위법한 명령에 맞서 미적거리며 시간을 벌어준 ‘제복 입은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13일 시민사회단체들이 계엄 사태의 실체를 제보하고자 하는 계엄군 등 관련자들을 적극 지원하고, 지휘부의 위법한 명령을 거부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경호처 직원들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공표했습니다. 변호사들이 법률 지원을 담당하고, 필요시 무료 변론까지 합니다. ‘위법한 명령은 복종할 의무가 없다’, 최근 박정훈 대령의 항명죄 무죄 판결에서도 재확인한 확고한 법 원칙입니다.”
- 이후 집회는 어떻게 됩니까.
“윤석열의 탄핵은 진보·보수, 여야의 문제가 아닙니다. 평범한 민주주의 일반 교육을 받은 대한민국 시민들의 요구입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광화문에서 집회는 계속 이어갑니다.”
- 초연결사회에선 시민단체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행동을 조직하고 정치·사회 이슈에 참여하는 일이 가능해 졌습니다. 참여연대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에 젊은 세대는 큰 관심이 없을 거야’라는 생각도 속단인 것 같아요. 어떤 단체에 속하겠다는 생각은 줄었지만 관심 있는 주제에는 적극적이더라고요. 시민들의 행동 양식이 바뀌었기 때문에 참여연대도 그에 맞춘 소통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작년에 저희가 30주년이었어요. 앞으로는 참여연대가 눈길을 좀 주지 못했던 기후위기 분야에서도 참여연대 방식으로 해볼 생각입니다. ‘기후위기가 초래할 위협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게 강하게 닥쳐올 것이다’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