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트리거 60' ㉑ 서울올림픽, 2002 월드컵

대한민국은 언제 선진국이 되었는가. 일찍이는 1991년이다. 그해 12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회의에서 한국을 선진국으로 간주한다고 발표했다. 96년 10월에는 ‘선진국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2021년 7월에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했다. 선진국은 주로 경제에 기준점을 두지만, 한 국가의 종합역량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스포츠는 그 한 축을 담당한다. 한국은 88년 올림픽을, 2002년 월드컵을 주최했다. 2018년 평창올림픽까지 대회를 주최할 때마다 한국은 변화했고, 국제적 지위도 달라졌다.
지구촌 전역으로 확대된 한국인의 의식

올림픽은 정치적이다. 선언하고 웅변한다. 1936년 베를린 대회가 본보기다. 히틀러는 독일이 1차 대전 패전의 굴욕을 딛고 유럽의 중심으로 돌아왔음을 선언했다. 2차 대전 패전국 일본도 64년 도쿄에서 베를린의 예를 따랐다. 88년 서울올림픽은 그 변주다. 한국은 외세강점과 전쟁의 폐허 위에서 근대화를 완수했음을,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예고했다. 근대화를 말할 때 제3공화국 대통령 박정희를 우회할 수 없다. 올림픽도 마찬가지다.
76년 8월 19일 오후, 박정희는 청와대에서 몬트리올올림픽 선수단 27명을 맞는다. 이 자리에서 “우리도 몇 년이 지나면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을 만큼 경제력이 커질 것”이라고 말한다. 78년 가을에는 전국체육대회 개막식에서 80년대에 아시안게임은 물론 올림픽 대회도 유치하리라는 기대를 표현한다.
박정희가 79년 12월 사망하자 올림픽 유치 논의는 잠복한다. 이듬해 말, 상황이 급진전한다. 대한올림픽위원회(KOC)는 12월 3일 “서울특별시장이 88년 올림픽의 서울 개최를 보증한다”는 전문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본부에 보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전두환이 움직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그는 올림픽의 의미와 효용에 주목했다. “올림픽을 유치해 한국의 능력을 국제적으로 과시하고 분열된 국론을 결집하자!”
80년 11월 6일. KOC 긴급 상임위원회가 소집된다. 상임위원들은 올림픽 유치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내용을 전달받은 상임위원들의 태도는 부정적이었다. 그러자 KOC 위원장 조상호가 품에서 편지 두 장을 꺼내 읽어 내려갔다. 이 자리에 참석한 김영기(전 한국농구연맹 총재)는 당시의 일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대통령의 친필 편지였다. ‘대통령 전두환’, 이러고 나서 ‘반대하실 사람 있습니까?’하고 묻는데 거기서 누가 손을 들겠는가?”

같은 달 30일, 전두환은 문교부 장관 이규호에게 올림픽 유치 신청서를 IOC에 제출하도록 지시했다. 마침내 81년 10월 30일 밤 11시45분,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위원장이 제24회 올림픽의 서울 개최를 확인하는 투표 결과를 발표한다. 서울 52, 나고야 27. 불리하리라던 예상을 깬 승리였다. 서울올림픽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스포츠 행사로서 성공했다.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획득해 종합순위 4위에 올랐다. 역대 최고 성적이다. 대회 운영에서는 흑자 2520억원을 기록했다. 총지출 5890억원, 총수입 8410억원. 재정흑자 가운데 정부출연금 371억원, 국민성금 565억원 등 기부금 2341억원이 포함됐기에 순익은 179억원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동서로 갈라진 올림픽이 다시 하나가 됐다. 서방은 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규탄하며 이듬해 모스크바 대회를 보이콧했다. 공산 진영은 4년 뒤 LA 대회에 불참했다. ‘손에 손 잡고’를 노래한 서울올림픽에는 160개 IOC 회원국이 참가했다. 냉전체제는 종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91년 12월 26일엔 소련이 해체됐다.
셋째, 한국인의 의식세계를 불가역적으로 바꿔 놓았다. 냉전시대에 스포츠는 효과적인 정책수단이었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은 블랙홀처럼 한국 사회를 빨아들였다. 두 이벤트 사이에 일어난 시민혁명이 시대의 전환을 알렸다. 마지막 군인 출신 대통령의 올림픽 개막 선언은 상징적이었다. 독재는 불가능했다. 문화는 개방됐다. 한국인의 시야는 전 지구로 확대됐다.
서울올림픽 이후 37년. 올림픽은 이제 가장 중요한 운동대회가 아니다. 국민들은 메달이 국위를 선양한다고 믿지 않는다. 매일 저녁 프로야구 경기가 삶에 활기를 불어넣고, 주말에 터지는 손흥민의 골이 기쁨이 된다. 올림픽과 스포츠의 패러다임은 도전받는다. 제도와 문화, 의식의 변화까지 요구된다. ‘체육 영재학교 설립’ 같은 주장은 반시대적이다. 이미 체육중·고와 대학교가 있다. 그 효용과 한계는 분명하다.
외환위기 극복한 자신감 표출

그리고 2002년 월드컵. 그해 6월. 대한민국은 특별했다. 장애도, 차별도, 반목도, 질시도 없는 꿈같은 세상.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장애인과 외국인 노동자까지 붉은 티셔츠를 입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월드컵은 ‘가진 사람들’이나 ‘힘센 사람들’만의 잔치가 아니었다. 골고루 행복했다. 붉고 뜨거웠던 6월은 한국인이 꿈꿨던 대한민국, 그 완성된 퍼즐 같았다.
월드컵 개최는 한국 스포츠 사상 최대 사건이었는지 모른다. 올림픽을 치렀고, 국제무대에서 많은 성과를 올려 세계 10대 스포츠 강국의 반열에 올랐지만 월드컵만큼 한국을 송두리째 뒤흔들면서 한국을 바라보는 세계의 눈을 밝혀 준 이벤트도 없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이벤트를 유치해 완벽하게 성공시킨 한국인의 자부심은 가장 높은 곳에 이르렀다.

월드컵은 새로운 세대를 탄생시켰다. ‘W세대’. 이들은 연인원 2100만 명을 동원한 길거리 응원과 월드컵 열기의 중심이었다. 한때 역사의 주역을 담당한 ‘4·19세대’ ‘6·3세대’ ‘386세대’의 배경에는 정치의식이 있었다. 10대 후반~20대의 W세대는 개인주의에 기초한 수평적 결합의 산물이었다. 배낭·인터넷·휴대전화·생수병 등이 이들의 아이콘이었다. 이들은 누가 권하거나 요구하기 전에 스스로 움직였다.
W세대는 자신감이 넘쳤다. 자신감은 긍정의 태도로 나타났다. 70년대 ‘유신반대’, 80년대 ‘독재 타도’, 90년대 ‘낙선 운동’, 2000년대 ‘안티 운동’에서 보듯 우리 사회는 부정(否定) 명제가 지배했다. W세대는 ‘꿈은 이루어진다’와 같은 긍정의 메시지를 외쳤다. 근대 이후 100년간 한국인을 억누르던 서양에 대한 공포감 또는 열등감을 떨쳐냈다.

W세대는 대한민국과 태극기를 자신들의 표현 양식으로 채택했다. 텔레비전 중계화면 속의 국명은 ‘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바뀌었다. 붉은색과 태극기를 이용한 W세대의 다양한 패션은 사회 저변에 앙금처럼 남아 있던 ‘레드 콤플렉스’와 엄숙주의의 금기도 털어냈다. ‘빨갱이가 되자’로 오해받을 수 있는 ‘Be the Reds’라는 슬로건에 누구도 저항하지 않았다.
“기본에 충실하라” 히딩크의 메시지

6월의 기적은 월드컵 4강이라는 성과로 집약된다. 세계적 스타가 없는 한국팀이 결승 문턱까지 갔다. 역시 성적은 중요했다.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면 ‘오 필승 코리아’의 함성도, 수백만 붉은 악마의 길거리 응원도 없었을 것이다. 4강 신화가 있었기에 거스 히딩크가 한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었다. 히딩크는 한국 사회에 강한 메시지를 남겼다.
첫째, 기본에 충실하라. 그는 한국 선수들이 양발을 다 사용한다는, 우리는 몰랐던 장점을 찾아냈다. 그러나 체력이 약하다고 진단하고 혹독한 훈련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둘째, 시련을 통해 강해진다. 참패를 감수하며 강팀과 부딪쳐 경쟁력을 길렀다. 셋째, 공정한 경쟁. 히딩크는 학연·지연·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기준은 오직 실력이었다. 그 결과 박지성·이운재 등이 떠올랐다.
선수들은 월드컵 이후 유럽 무대에 본격 진출했다. 손흥민과 김민재·이강인의 등장도 결국은 2002년 월드컵의 유산이다. 하지만 빛이 강하면 그늘도 짙다. 대표팀 경기에만 관중이 몰리고, 국내 리그는 썰렁한 편이다. 지난해에는 대표팀 감독 선임을 둘러싼 논란 때문에 축구협회장이 국회에 불려 나가기도 했다. ‘히딩크 리더십’에 대한 향수는 한국 축구의 정체 또는 퇴행을 보여준다.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편입니다.

허진석 한국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