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시작했지만, 취미로 미술을 한다고 하면 조금 서운하죠. 하하”
최근 자신의 세 번째 개인전 ‘섞임, 긴 기다림의 미학 그리고 농악’을 마무리한 이지 작가(81·본명 이서형)는 7일 전시회가 열렸던 서울 종로구 삼청동 동덕아트갤러리에서 중앙일보와 만나 “미술을 누구보다 진심으로 공부했다”며 “앞으로도 인공지능(AI) 활용, 예술과 비즈니스의 융합 등 하고 싶은 일이 많다”고 강조했다.

그는 장수 최고 경영자(CEO)로 잘 알려져 있다. 대표이사 자리에 앉았던 기간만 10년이 넘는다. 1968년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그는 1995년부터 2001년까지 금호건설 대표이사로 일했다. 2002년 금호산업 고문을 끝으로 26년간의 건설인 생활을 정리한 뒤, 이듬해 용인대 회화과에 편입했고 2008년 용인대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그는 “은퇴 후 매일 뒷산을 오르며 사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기도 했다”며 “사계절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그린 그림들로 2007년과 2010년 두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다 2010년 다시 금호석유화학 CEO로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당시 어려웠던 회사의 구원 투수 역할로 불려가 2013년까지 대표이사직을 맡았다. 이 작가는 “회사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미술 활동을 계속했을 것”이라며 “복귀 결정을 한 이후로는 다시 전시회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의 작가 본능을 일깨운 건 10대 손자다. 지난해 용인 자택에서 손자와 시간을 보내며 그림 관련 얘기를 하던 도중 “마음속 무엇인가가 올라왔다”는 게 이 작가의 설명이다.

이 작가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전통문화에서 영감을 많이 얻는다. 2010년 두 번째 전시회는 ‘살풀이춤’이 주요 모티프가 됐다. 이 작가는 살풀이춤을 ‘소통’과 연결했다. 이 작가는 “‘풀이’는 ‘섞이는 것’을 의미하며 현대적인 표현으로는 소통을 의미한다”며 “신과의 소통, 하늘과의 소통, 타자와의 소통 등 소통으로서의 살풀이는 현대에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농악’이 주요 소재가 됐는데 역시 15년 전시회에서의 주요 주제였던 살풀이춤 및 소통의 연장 선상이기도 하다.
김성철 미술평론가(동덕여대 교수)는 “이 작가는 농악을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서사로 확장했다”며 “이를 살풀이춤으로 구체화했다”고 평했다. ‘소통’은 제작 기법을 통해 표현했다. 물감을 흘려 스스로 섞이도록 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섞임이 소통의 본질이다”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러시아 태생 추상화가 바실리 칸딘스키를 좋아한다는 이 작가는 “여전히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심심한 것을 못 참는다”고 했다. 하고 싶은 일도 많다. 단지 미술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미디어 아트에도 관심이 많아 살풀이춤과 농악을 주제로 한 영상 작업도 진행 중”이라는 그는 “향후 AI를 예술 작업에 어떻게 활용할지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사업화도 계획하고 있다. 이 작가는 “예술과 비즈니스를 융합해 제 미술 작품을 새로운 상품과 결합하는 등, 어렵지만 새로운 융합 사례를 만들어보려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