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워싱턴DC에 근무하는 한국 기업 주재원들이 미국인 현지 직원과 대화를 하다 보면 놀랄 때가 많다고 한다. 서울 본사의 속사정을 본인보다 더 잘 알고 있어서다. 비결은 뉴스 검색과 번역 기능. 클릭 한 번으로 실시간 번역이 되는 덕분에 미국 현지 직원들은 한국 언론에서 보도되는 본사 사정을 깨알같이 파악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 같은 현상은 기업에 국한되는 일은 아니다. 서울에 있는 주한미국대사관 역시 한국 언론의 자국 관련 보도를 번역해 미 국무부에 전달하고 이는 다시 미국 전 부처와 백악관에 뿌려진다. 과거에야 일일이 번역하는 수고를 들여야 했지만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클릭 한번으로 광범위한 보도를 수집할 수 있다.
놀라울 것도 없는 번역 기술 얘기를 새삼 꺼낸 것은 최근 한미 관세·안보 협상 타결 이후 당국자들이 협상 과정의 에피소드를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상황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9·11 사태 때 동생을 잃었던 것을 기억하고 러트닉 장관에 “9·11에 예배만 드리겠다고 했더니 러트닉 장관이 ‘예스, 생큐’라고 답이 왔다”고 소개했다. 교착상태에 있던 한미 협상이 그때를 기점으로 급물살을 탔다는 설명이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핵추진잠수함을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할 것이라고 밝힌 것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필리 조선소 상황을 잘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라고 공개 발언을 했다. 또 한미 관세 협상 과정에서는 러트닉 장관에 비공식 채널을 통해 “한국을 밟는다고 밟아지는지 한번 보라. 밟는 발도 뚫릴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했다는 무용담도 나왔다.
문제는 한미 관세·안보 협상이 이제 산 하나를 겨우 넘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핵추진잠수함 건조 지역 등을 놓고 한미 간 후속 협상이 남아 있고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역시 실행으로 연결되려면 미국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한미 관세 협상 과정에서의 사적인 에피소드를 공개적으로 발언하고 트럼프 대통령까지 평가절하하는 우리 정부의 당국자들을 보는 미국 측은 어떤 생각을 할까.
투자 부문도 마찬가지다. 한미 전략적 투자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보면 간담이 서늘해지는 문구가 한둘이 아니다. 미 상무장관이 위원장으로 있는 투자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미국 대통령이 투자처를 선정하며 한국은 45일 이내 필요한 금액을 지정된 계좌에 입금해야 한다. 한국이 투자를 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한국에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내용도 담겼다. 미국이 투자처를 정할 때 ‘상업적 합리성’을 따지고 한국과도 협의한다는 부분이 있지만 한미 관계에 이상 기류가 생긴다면 우리에게 좋을 리가 없다.
지금은 한미 협상이 타결됐다고 샴페인에 취할 때가 아니다. 외려 더욱 차분하고 철저하게 후속 협상을 준비해야 한다. 일본은 먼저 움직이고 있다. 지난달 미일 정상회담을 기해 일본 기업이 관심을 보이는 미국 사업 목록을 미국 측에 제시했다. 미국이 상업성 없는 사업을 선정하기 전에 일본에 이익이 되는 프로젝트를 내밀어 선수를 친 셈이다. 일본이 알짜 사업을 선점한다면 뒤늦게 움직이는 우리에게는 수익성 없는 사업만 배정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전 국민의 관심이 높았던 사안인 만큼 당국자 입장에서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국민에 알리고 적극적으로 홍보도 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한미 협상이 이제 시작인 상황에서 무용담은 나중으로 미뤄두는 게 현명한 처신이다. 외국 저명 인사들이 협상을 성사시킨 뒤 에피소드를 공개적으로 내놓은 사례를 본 적이 없다. 이들이 수년이 지난 뒤에야 회고록 등을 통해 후일담을 남기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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