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갑진년의 마지막 달이다. 누구나 지난 1년을 반추하면서 후회 없는 1년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뭔가 아쉽고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 대부분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세밑의 소회일 것이다.
연말이 다가오면 그간 각별했으나 자주 만나지 못하였던 사람들, 차마 만나자고 연락을 하지는 못하였으나 보고 싶었던 사람들, 이제는 내 곁을 떠나버린 야속한 그 님마저도 생각나게 하는 그런 시절이 요즘의 세밑이 아닌가 싶다.
칼 세이건에 대하여는 누구나 그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1980년에 cosmos란 책과 영상을 통하여 우리 같은 대중들에게 우주에 대하여 미미하게나마 현실적으로 마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던 그 위대한 천문학자가 바로 칼 세이건이다.
코스모스를 읽으면서 내 나이만큼의 광년에서 떨어진 별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막 태어난 나를 볼 수 있다는 사실, 우리가 현재 바라보고 있는 태양은 8분 전의 태양이라는 사실은 천문학이나 물리학에 문외한인 우리에게도 충분히 검증 가능한 사실이었고, 시공간이 변한다는 상대성 이론마저도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하나 가슴으로는 이해하면서 무척 행복해하면서 광대한 우주에 비하여 극히 미미한 나,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들었고 간혹 우주 철학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들곤 하였다.
cosmos에서 칼 세이건은 cosmic calendar라는 조어를 만들었다.
우주의 나이 138억 년을 1년이라 가정했을 때, 빅뱅은 1.1.00:00, 현재는 12. 31.00;00이고, 우리 지구가 태어난 시점은 9월 15일경, 현생 인류가 나타난 시점은 12. 31. 23:52분으로 축약하여 장대한 우주의 시공간을 이해하기 쉽게 함축적으로 설명하였다.
뜬금없이 칼세이건이나 cosmic calendar를 들먹이는 것이 꽤 생뚱맞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이를 언급한 것은 因緣의 소중함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는 의미이다.
칼 세이건은 우리 우주의 시간을 138억년, 우주의 크기에 대하여는 1천억 개의 항성이 모인 은하, 그러한 은하가 1천억 개가 모인 곳이 우주이며, 거리로는 138억광년(1광년은 빛의 속도로 1년을 가야 하는 거리)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분명히 이 우주에는 지적인 생명체가 살고 있는 것이 확실함에도 왜 우리는 그들과 조우할 수 없을까? 이는 도저히 조우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시공간의 차이 때문이다. 즉, 지적생명체가 우리 지구를 방문하여 지구의 역사서에 한 귀퉁이를 장식하기 위하여는 아무래도 현대적 과학문명이 싹트기 시작한 산업혁명 이후의 시기였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cosmic calendar 12. 31. 23:59:59초 경일 것이고, 이는 지구 역사 1년 중 가장 마지막 1초의 시간만이 광대한 우주에서 우리를 찾는 지적생명체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점이라는 점, 거기에 지적생명체가 거주할 수 있는 이 우주 어딘가의 공간이라는 점을 대비한다면 우리가 왜 지적생명체와 조우할 수 없는가는 과학의 영역이 아닌 확률의 영역으로 보아야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우리가 지구에서 태어날 확률은 우주의 관점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이다.
이렇듯 불가능한 확률에도 우리는 이 지구상에서 현재의 가족, 친구, 민족, 더 나아가 인류라는 존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를 ‘緣’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일까? 라는 생각하면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태양계 내부에서만 바라보아도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한 이 지구에서 내 주변인들의 소중함과 그들의 존재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와 경외감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의 의미도 우주에서의 ‘緣’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
사소한 갈등으로 인한 미움, 그로 인한 분노 등은 우리의 ‘緣’에 비한다면 그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가?
지금 우리 사회에는 각계각층의 갈등과 반목으로 국론은 여와 야로 나뉘었고, 전통적인 정의(正義)는 내편 네편에 따라 그 정의(定意)를 달리하며, 노소(老少)에 따른 반목, 심지어 가장 소중해야 할 가족간에도 그 반목이 심각하기만 하다.
창밖을 바라보니 게으른 가을은 아직도 겨울을 밀어내고 있으나 이는 가을의 욕심일 뿐 곧바로 겨울이 닥칠 것은 자명하다.
올해가 가기 전에 소원했던 그 누구, 각별했던 그 누구,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과 우주와 ‘緣’을 생각하며 눈 내리는 풍경이 보이는 멋진 카페에서 망년회라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성순 법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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