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12월 대법원이 통상임금 범위 확대 판결(판단 기준서 고정성 제외)을 하자, 기업들이 대혼란에 빠졌다. 2013년 대법원이 ‘조건부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이 아니다’라고 한 판단이 일시에 뒤집어졌기 때문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바뀐 통상임금으로 기업이 새로 지게 될 인건비 규모를 약 6조 8000억 원으로 예상했다. 최근 서울시버스노동조합과 사측·서울시의 갈등도 새 통상임금 때문이다.
노동법은 1953년 제정된 후 큰 틀에서 바뀌지 않아 50년대에 머문 ‘공장시대 노동법’이라고 불린다. 산업과 기술 변화에 맞춰 경직된 법과 제도를 고치자는 요구는 늘 ‘노동 개혁’이란 이름으로 분출됐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어느 후보도 노동 전반의 큰 글림인 개혁을 내걸지 않았다.
25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김문수 국민의힘·이준석 개혁신당 후보 모두 10대 공약에 ‘노동 개혁’이란 키워드가 없다.
역대 정부의 노동 개혁 실패를 본 대선 후보들이 표를 의심해 ‘과감한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노동 개혁은 국민 삶과 직결되기 때문에 정교한 제도 설계와 노동계·경영계·정부의 충분한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 이해관계가 첨예한 노동법과 제도는 노동 개혁이란 패키지 딜(Package Dea·사안별 합의·양보로 전체 일괄 타결)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노동법 개정안을 강행했다가 노동계 총파업을 불러왔다. 박근혜 정부는 2015년 노사정 대타협까지 이뤘지만, 양대 지침(저성과자 일반 해고, 취업 규칙 변경 요건 완화)을 추진해 실패했다. 윤석열 정부는 제도 개혁이 막히자, 노동계 반발을 부른 ‘노사 법치주의 확립’으로 급선회했다.
여러 전문가들은 ‘낡은 노동법과 제도’가 노사의 자율성을 뺐고 현장 불확실성을 키운다고 우려한다. 통상임금은 해외와 달리 기본급이 적고 수당이 많은 우리나라의 기형적인 임금 체계 속에서 수많은 노사의 갈등과 법정 다툼을 만들었다. 하지만 근로기준법이 아니라 이 법 시행령에서 규정될 정도로 방치됐다는 비판을 받는다. 근로기준법은 ‘한 주의 근로시간은 40시간을, 하루 근로시간은 8시간을 넘을 수 없다’고 규정한다. 한 주 40시간에 연장근로 12시간을 더한 근로시간 제도가 ‘주 52시간제’다. 주 52시간제는 근로시간을 획일적으로 정하는 게 맞는가란 비판에 직면했다. 전체 기업의 90%가 넘는 중소기업은 시·일·월·연 단위로 근무시간 시스템을 세분화하기 어렵다. 집중적으로 일하고 쉬고 싶은 현장 수요도 반영하지 못한다. 결국 대법원은 작년 12월 연장근로를 하루 단위가 아니라 일주일 단위로 계산하라고 판결했다. 이정민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근로시간과 연동된 임금 체계는 근로자가 더 오래 일하도록 만든다”며 “생산성에 기반한 보상적 임금 체계는 근로자가 효율적으로 일하게 한다”고 조언했다.
현 노동법과 제도가 미래를 대비할 수 없다는 지적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한국은행은 2023년 보고서를 통해 국내 일자리 중 약 12%(341만개)가 AI로 인해 대체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대선 후보들은 인공지능(AI) 일자리를 강조하면서 AI가 만들 일자리 소멸에 대한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플랫폼 종사자의 근로자성 문제는 노동 시장의 화두다. 플랫폼 종사자를 근기법 근로자로 볼 지에 대한 논란이 가열차다. 근로자성 판단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작년 7월 호출 서비스 ‘타다’의 운전기사를 근로자로 인정했다. 반면 고용노동부는 올 1월 쿠팡 배송기사(퀵플렉서)를 근로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노동학계에서는 AI 기술을 활용한 알고리즘의 ‘노동 통제’가 이 혼란을 더 키울 것으로 우려한다. 하지만 이재명·김문수 후보는 공약에서 ‘별도 법을 만들어 플랫폼 종사자를 보호하겠다’며 근로자성 판단 문제를 우회적으로 비껴갔다는 지적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