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외감 저절로 솟는 찬란한 문명의 유산

2024-10-09

(50) 잉카 이야기 (3) 마추픽추의 비밀

해발 2400m의 마추픽추…주거지·경작지 두 구역으로 구분

언제·어떻게·왜 지어졌는지 밝혀지지 않아 학자 간 논란 많아

마추픽추의 관문은 ‘태양의 문’으로 불리는 해발 2745m의 ‘인티푼쿠’다. 아래쪽 마추픽추에서 올려다보면 바로 이곳에서 태양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삼오오 돌계단에 걸터앉아 아침식사 겸 간식을 먹는 내내 발아래 펼쳐진 풍경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마추픽추 뒤로 우람하게 솟아 있는 와이나픽추와 한결 더 가까워진 우루밤바 강이 한데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특히 아구아스 칼리엔테스까지 이어지는 지그재그 능선길도 몹시 험해 보이면서도 그림처럼 아름답다.

자리를 정리하고 다시 배낭을 짊어졌다. 좁은 돌담길을 따라 모두 총총걸음으로 내려갔다. 마추픽추 현장까지는 고도 차 300m를 더 내려가야 한다. 도중에 ‘수호자의 집’ 앞에 잠시 배낭을 내려놓았다. 마추픽추 전체 정경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이다. 방문객 대부분이 이곳에 서서 인증사진을 남긴다.

마추픽추는 해발 2720m 와이나픽추 봉우리를 병풍 삼아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뉜다. 북쪽으로 둘레 1㎞의 주거지와 남쪽으로 둘레 500m의 계단식 경작지이다. 수호자의 집에서 내려와 잠시 후 사각의 출입구를 통해 주거지 성안으로 들어서면 태양의 신전과 3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그리고 콘도르 신전 등이 이어진다.

중앙 광장을 비롯하여 태양을 잇는 기둥이라는 인티후아타나를 거쳐 주거지 북단의 성스러운 바위까지는 직선거리 400m 정도다. 인티푸쿠에서 내려다볼 때는 그 장쾌함에 압도되고, 30분 후 해발 2430m의 이곳 현장에 내려서고는 각각 건축물들의 섬세함과 정교함에 놀랐다.

그러나 곧이어 의문에 싸인다. 수십 톤이 될 법한 이런 거대한 바위들을 과연 어디에서 어떻게 이 높은 곳까지 옮겨올 수 있었을까. 그런 돌덩이들이 어찌 그렇게 사이사이에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이 완벽하게 맞물려 쌓일 수 있었을까. 아직 쇠나 철이란 물질을 몰랐던 잉카인들이었다. 철재 도구 하나 없이 청동 구리나 암석들만으로 어떻게 이런 산상 도시를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잉카 트레일을 걸어 마추픽추에 도달한 트레커라면 누구나 품게 되는 의문일 것이다. 잉카인들에 대한 경외감이 저절로 솟아나는 3박4일 여정이었다.

마추픽추는 110여 년 전 미국의 고고학자 하이람 빙엄이 발견할 때까지 수백 년 동안 꽁꽁 숨겨져 있었다. 현지인 몇몇이 농사를 짓고는 있었지만 외부와는 철저히 단절된 채였다. 이 거대한 공중도시가 언제 어떻게 어떤 연유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선 학자들 간에 논란이 많다. 다만 근래 들어선 잉카제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인 파차쿠티 재위(1438~1472년) 때 별장 용도로 지어졌고, 평소엔 황실에서 파견 또는 동원되는 수백여 명이 교대로 농사짓고 살며 관리했다는 설이 힘을 받는 듯하다.

파차쿠티는 이전의 쿠스코 왕국부터 치면 9대 왕이면서 제국으로는 초대 황제로 통한다. 그가 정복해 놓은 광범위한 영토를 기반으로 아들 투팍과 손자 우아이나 황제 때 제국의 최전성기를 누렸으나 증손자 아타우알파가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인질로 잡혀 살해되면서 제국의 멸망을 초래했다. 아타우알파(재위 1532~1533년)를 살해한 후에도 스페인 정복자들은 꼭두각시 황제를 내세워 잉카제국을 40년 동안 유지시켰다. 식민 통치 목적상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당시 마추픽추는 어떤 상태였을까? 아직까지는 불명확하다. 문자나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 추정해 볼 수는 있다. 황제의 별장이라 하지만 이 깊은 산속까지 황제는 한 번도 행차한 적이 없고, 일부 고위 관료들만 은밀하게 방문해 황제 행세하며 호위호식하다 가는 곳으로 관리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532년 카하마르카 대살육 사건 이후 유럽인들이 얼마나 잔혹하고 무자비한지 제국 전체로 소문이 퍼졌다. 천둥 번개 같은 무기에 철갑을 두른 채 처음 보는 말까지 탔으니 하늘에서 내려온 천군(天軍)들이나 다름없었다. 인디오 민초들이야 살던 곳에서 그대로 살 수밖에 없었지만 지배 계층은 달랐다. 어떡하든 유럽인들을 피해야 했을 것이다. 온갖 재물과 하인들을 앞세워 깊은 산속 오지로 숨어들었을지도 모른다. 그중 한 곳이 마추픽추였을 수도 있다.

그들은 이곳을 제2의 쿠스코처럼 지배와 피지배 계급이 확실하고 온갖 사회 인프라가 갖춰진 소도시로 만들어 운영했을 것이다. 적어도 서너 새대쯤은 대를 이어가며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어느 날, 유럽인들이 이곳을 알아채곤 곧 쳐들어올 거라는 헛소문이 돌았다. 공포에 질린 그들은 경황없이 다급하게 흩어져 뿔뿔이 어딘가로 도망쳤으리라.

역사적으로 검증된 건 아니지만 마추픽추를 설명하는 여러 가설들 중 하나다. 1910년 빙엄이 마추픽추를 발견할 당시, 누군가의 침입이나 파손 흔적 없이 너무도 멀쩡한 상태로 오래전에 비워졌고 그 상태로 그때까지 온전하게 남겨진 건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불가사의다. 3박4일 잉카 트레일을 함께 걸은 패키지 팀원들과 헤어지고 30분 가까이 버스를 타고 우르밤바 강가의 아름다운 마을 아구아스 깔리엔테스로 내려왔다. 해발 2040m 지점이라 고도 차 400m 내려오면서 열세 번의 지그재그를 거쳐야 하는 급경사 도로였다.

점심 식사 후 주변 호스텔에 들어갔다. 우리 돈 5000원 정도에 간단한 샤워까지 마치고 역 주변을 둘러보다가 3시 40분 기차에 올랐다. 역 대합실 대기 중에 들었던 ‘라스트 모히칸’의 영화음악 멜로디가 계속 귓전을 맴돌았다. 음반 파는 인디오가 팬플루트를 연주하며 다양한 곡들을 들려줬었다. 한결같이 이곳 안데스 분위기에 맞는 곡들이었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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