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게 안부를 묻다

2024-10-08

자고 일어났더니 하루아침에 가을이 왔다. 양팔을 문지르며 허둥지둥 가을옷을 찾아 꺼내 입었다. 이른 아침, 습도가 줄어든 법당 안에도 향내음이 그윽하여 들이마신 폐까지도 향기로워지는 느낌이다. 이제 며칠 후면 북녘에서부터 시작된 홍엽의 물결을 타고 온 산야가 알록달록 꽃처럼 피어나겠지.

문득 ‘꽃밭에서’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운 꽃이여”라는 고운 노랫말! 가을은 또 다른 봄이라고 하지 않던가. 머지않아 물과 햇빛이 부족한 겨울을 나기 위해 제 몸을 스스로 붉게 태운 홍엽의 꽃들이 우리를 설레게 할 것이다.

함께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인사

나를 토닥이는 대자연의 화답

우리는 모두 서로를 돌보는 인연

지난 여름은 가을이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습하고 무더웠다. 그러다 갑자기 뚝 떨어진 아침 기온 탓인지, 일상을 이루고 있는 것들에게 안부를 묻곤 했다. 중심이랄 수도 없는 그런 주변의 것들에게 말이다. 이를테면, 어려선 식구처럼 살다시피 하다가 어느 날 집을 나가선 뜨문뜨문 찾아오는 동네 길고양이 ‘흑미’가 그렇고, 조그만 암자의 산문을 나설 때마다 눈을 마주치게 되는 도량 가득한 국화가 그러하며, 서툰 운전 탓에 모퉁이를 할퀸 자동차에도 안부를 건네본다.

가벼운 눈인사 정도가 아니다. 내가 직접 지어준 이름을 신도들 불명 부르듯 하나씩 호명하며 묻는다. “흑미야, 어디야?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오늘은 지견이네 꽃송이가 더 예뻐졌네.” “상처 난 곳이 아직도 아픈 거야?” 등등…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안부를 묻던 중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뭐라는 거니? 지금 누구에게 묻는 거야? 그렇게 묻는 너는 지금 괜찮은 거야?’

공생관계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선한 시그널이 돌고 돌아 결국엔 내게로 왔다. 어쩌면 그간 주위에 던진 나의 물음은 고양이나 꽃들이 아니라, 자신에게 보내는 안부임과 동시에 고단한 삶에 대한 위로였던가 보다. 이렇게 묻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파란 하늘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이 일 끝나면 저 일이 다가오는 삶, 이것을 수행으로 여겨야만 견딜 수 있는 삶이다. 그러나 누구도 당신에게 그렇게 살라고 등 떠민 적 없노라고, 그러니 자신을 태우면서 아름답게 물들어보라고, 그 정도는 괜찮게 사는 거 아니냐고, 옆에 있던 꽃들이 응원해 주는 듯하다. 처마 끝으로 반쯤 든 한가한 햇살에 졸고 있던 꽃들이 외려 나를 토닥여준 덕분에, 진실로 나는 안온함을 느낀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기 토마토의 말이다.

“엄마, 벌레가 날 깨물어!”

이것은 동화책의 한 구절이 아니다. 브라질 연방 펠로타스대학 연구원 헤이시그 박사의 연구 논문에 실린 글이다. 실제 토마토에서 벌어지는 일이란다. 식물은 동물과 달리 신경조직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대신 몸을 구성하는 줄기와 잎, 열매에 물과 영양분을 전달하는 도관(導管, 또는 물관)과 사관(篩管, 또는 체관)이 있어 끊임없이 전기신호가 흐른다고 한다. 식물도 동물이나 인간처럼 느낄 줄 아는 존재라는 것이다. 마치 절 마당에 피어있는 제철 꽃들이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느끼는 존재라는 것은 곧 소통이 가능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집에서 관상용 분재나 화초 등 반려식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금세 식물과의 소통이 어렵지 않다는 것에 공감할 것이다. 과학으로 증명된 식물의 전기신호도 어쩌면 동물에게 있는 신경조직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생각해 보면, 옛날에는 마을 어귀에 있는 큰 나무를 대자연의 일부로만 여기지 않고, 정령이 깃든 생명체로 보아 소통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마을 어귀를 지키는 당산나무가 역병과 재앙을 막아줄 거라고 믿으며 신성시했다. 나 또한 어릴 적 그 나무 그늘에서 친구들과 뛰놀며 유년 시절을 보냈고, 어른들은 모여서 바둑이나 장기를 두기도 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나는 먼 미래를 꿈꾸기도 했다. 우리에게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었다.

화엄의 초조인 두순(杜順) 스님은 “가주의 소가 풀을 먹으니, 익주의 말이 배가 부르다(嘉州牛喫草 益州馬腹?)”고 했다. 이는 곧 모든 것은 하나하나 별개로 구분하여 존재할 수 없다는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으로도 해석된다. 인간과 자연은 결국 하나라는 얘기다. 새 깃털보다 가벼운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커다란 파도를 일으키게 한다는 ‘나비효과’도 불교의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법성원융’이나 ‘상즉상입’과 결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가을은 중간정산의 계절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에 들어서기 전 잠시 멈춤으로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다시 가을에게 안부를 묻는다. 그것은 결국 나 자신에게 묻는 안부일 테니.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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