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망한 연구 자랑합니다”

2024-11-15

실패에서 배운다, 카이스트의 이색 도전

‘천재들의 집합소’로 불리는 KAIST (카이스트)엔 다른 대학에선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연구소가 있다. ‘실패할 수 있는 자유’를 모토로 2021년에 설립된 실패연구소가 그것이다. 수재 소리를 듣고 주위의 기대를 모으며 성장했지만 카이스트 입학 후 ‘무한 경쟁’에서 좌절을 겪는 학생이 적지 않았다.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경직된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극단적 선택을 결심하는 사례도 잇따랐다. 실패연구소가 출범한 배경이다.

지난 13일 카이스트 대전 본원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올해로 2회째를 맞은 ‘망한 과제 자랑대회’였다. 대회장에는 두세 명의 학생이 한 팀을 이뤄 만든 부스 10여 개가 세워져 있었다. 각자의 실패 사례를 담은 사진과 영상들이 전시된 부스 안에선 낙담하거나 무거운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전산학부 전준형씨는 ‘정치에 휘말려버린 나의 과제’라는 주제로 부스 앞에 섰다. 그는 지난해 말부터 ‘의대 정원이 이공계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지난 2월 정부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계획을 발표하면서 순조로웠던 연구는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맞았다. 전씨는 “사전에 인터뷰에 응하기로 약속한 의대생들이 모두 취소한 데다 연구에 필수적인 생명윤리심의위원회 승인 절차도 지연됐다”며 “결국 시한 안에 설문조사를 마치지 못해 제대로 된 결과를 도출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낙담하진 않았다고 했다. 그는 “말 그대로 완전히 ‘망한’ 연구였지만 의대 정원 확대가 이공계 위기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는 유의미한 결과도 얻었고 계속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확신도 갖게 됐다는 점에서 실패라고 볼 순 없지 않겠느냐”며 환하게 웃었다.

마라톤 중도하차, 논문 주제 5번 교체…“태어나자마자 걷는 사람 없다”

전기·전자공학부 3학년에 재학 중인 김세현씨는 지난 3일 열린 ‘2024 JTBC 서울마라톤’에 출전해 난생 처음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했다. 지난 2월 하프 마라톤을 완주한 뒤 자신감이 붙었던 그였다. 하지만 ‘말아먹은 말아톤’이라는 그의 실패담 주제에서 엿볼 수 있듯 결과는 대실패였다. 김씨는 “군 제대 후 복학해 학업을 따라잡느라 마라톤 준비에 소홀했던 게 패인이었다”며 “17㎞ 지점에서 결국 포기를 선언한 뒤 택시를 타고 도착지로 이동했는데, 완주한 사람들을 보니 부러움과 함께 아쉬움이 확 밀려오더라”고 전했다. 하지만 그 또한 절망하지 않았다. 김씨는 “이번엔 비록 완주하지 못했지만 일단 도전한 것만으로도 실패는 아니다 싶었다”며 “겨울방학 동안 열심히 준비해 내년 초 대구마라톤 대회에선 꼭 완주할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실패할 수 있는 자유’ 모토, 연구소 설립 걷는 사람 없다”

파키스탄 유학생인 세이드 쉬라즈 알리는 지난 5년간 한국 생활 동안 겪은 무수한 실패 사례를 소개해 관람객의 박수를 받았다. 박사 논문 주제만 다섯 번 바뀌는 등 힘겨운 시간을 보냈지만 실패담을 전하는 그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걷는 사람은 없다. 어린아이가 땅을 딛고 서서 걷기 위해 얼마나 많이 넘어지느냐”며 “실패는 곧 삶의 한 부분임을 깨달았고, 이를 동료 학생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카이스트 실패연구소는 지난 8일부터 2주간을 ‘실패 주간’으로 정하고 ‘망한 과제 자랑대회’와 ‘실패 에세이 공모전’ 등 실패 사례를 공유하는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각자의 실패 사례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그에 따른 고통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서로의 경험담을 함께 나누면서 ‘실패는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실패야말로 성공의 첫걸음’이란 인생의 진리를 자연스레 깨닫게 하자는 취지에서 해마다 실패학회 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실패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카이스트에 실패연구소가 설립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카이스트는 성적에 따라 수업료를 차등 징수하는 ‘징벌적 수업료 제도’가 도입된 뒤 과도한 경쟁 문화가 조성됐다. 여기에 ‘재수강 제한 제도’까지 더해지면서 카이스트 내부에서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연해졌다. 이후 관련 제도는 폐지됐지만 실패와 도전을 금기시하는 교내 분위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실패연구소가 2022년 말 카이스트 학생과 교직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어떤 일을 해내지 못했을 때 자신에게 충분한 재능이 없는 게 아닐지 두려운가’라는 질문에 학부생 10명 중 8명, 대학원생 10명 중 7명이 ‘두렵다’고 답했다. ‘실패가 자신의 미래 계획을 망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절반 이상이 ‘그렇다’고 답했다.

하지만 실패연구소가 설립된 뒤 학생들이 ‘실패’라는 단어를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지자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실패학회 행사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학생들은 동료들과 실패 경험을 공유하며 ‘한 번 실패는 곧 나락’이란 두려움을 떨쳐내기 시작했다. 그런 계기를 통해 학생들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망한 과제 자랑대회’ 참가자들은 웃지 못할 실패담을 넉살 좋게 늘어놓으며 즐겁게 행사에 임했고 관람객들은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학부생 이혜지씨는 “실패 경험담을 당당히 얘기하는 참가자들을 보며 내가 그동안 겪은 실패도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조성호 카이스트 실패연구소장은 “실패하면 끝장이란 중압감에 늘 짓눌려 지내던 학생들이 실패담을 처음 고백한 뒤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는 후일담도 많았다”며 “실패야말로 성공의 필요충분조건이란 긍정적인 인식이 확산될 수 있도록 앞으로 이런 행사를 더욱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포용적 태도 가져야 도전 문화 활성화

실패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건 카이스트 학생뿐만이 아니다. 실패연구소가 지난달 11~16일 전국 성인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도전과 실패에 대한 국민 인식조사’ 결과 응답자의 73.5%가 ‘실패는 성공의 발판이자 밑거름’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74.1%가 실패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고 63.3%는 실패가 두려워 도전을 포기한 경험이 있었다. 연구소는 “한국 사회가 표면적으로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데 동의하지만 막상 실패는 겪고 싶지 않아 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전 세대에 걸쳐 실패는 외부 환경보다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 부족 탓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도 특징”이라고 풀이했다. 사람들이 실패를 두려워하고 도전을 주저하는 데는 실패에 관대하지 않은 사회 분위기도 한몫하고 있다. ‘한국 사회가 실패에 관대한 사회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20.5%만 ‘그렇다’고 답한 게 대표적이다. 또 58.7%는 ‘한 번의 실패로 인해 낙오자로 인식된다’고 답했고 ‘한 번 실패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응답도 38.5%에 달했다. ‘한국 사회는 실패를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고 비난한다’는 응답도 64.9%로 ‘실패를 성장과 학습의 기회로 여긴다’(35.1%)보다 월등히 높았다.

연구소는 이 같은 조사 결과에 대해 “전반적으로 한국 사회가 혁신과 포용보다는 여전히 실패에 인색하고 경직돼 있으며 다양성에 대한 수용성이 낮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며 “실패에 대해 보다 포용적인 태도를 갖는 것은 한국 사회의 도전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필수 조건인 만큼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고민하며 개선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패는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이자 유교의 시조인 공자는 실패를 이렇게 규정했다. 얼핏 지혜롭게 삶을 개척해 나갔을 것 같지만 그의 인생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끊임없는 도전에도 벼슬길이 번번이 막혔지만 결코 실패에 굴하지 않았다. 그가 끝내 성공을 이룬 배경엔 실패를 딛고 일어선 힘이 자리 잡고 있었다. 카이스트가 성공이 아닌 ‘실패할 수 있는 자유’를 강조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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