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룹의 동질성과 친밀성이 그룹의 의사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실험이 있다. 서울대 경영학과의 박선현 교수의 콩 세기 실험이 그것이다. 실린더 모양의 긴 유리병 속에 강낭콩을 반쯤 채워 넣고 병 속에 들어 있는 강낭콩의 개수 추정치를 알아맞히는 실험이다. 한 그룹은 동질성이 높고 친한 그룹으로 구성하고, 다른 한 그룹은 동질성이 낮고 덜 친한 그룹으로 구성한다.
동질성이 높고 친한 그룹에서는 각자가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듯하다가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누군가가 그룹 내 가장 연장자에게 “형님이 생각하기에는 어때요?”라고 묻는다. 형님이 대답한다. “대충 900~1200개 사이를 안 벗어날 것 같아.” 형님의 이야기가 끝나자 이 그룹은 형님의 의견대로 빠르게 합의를 이룬다.
반면 동질성이 낮고 덜 친한 그룹에서는 유리병을 흔들어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콩들을 병 안에서 눕혀 보기도 하고, 단면을 사진을 찍고 평균 내서 층수를 곱해 보기도 하는 등 왁자지껄 논쟁을 벌인다.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방법론을 논의하다가 한참 만에 콩의 실제 개수인 1500개에 근사한 값으로 의견을 수렴한다.
그룹의 동질성과 친밀성이 그룹 내 인지 다양성을 저해해서 올바른 의사결정을 방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실험이다. 변동성이 높고(Volatile), 불확실하며(Uncertain), 복잡하고(Complex) 모호성(Ambiguous)이 높은 이른바, VUCA 시대에 혁신적이지 못한 조직은 도태되는 현재 상황에서 우리 조직의 인지 다양성 수준은 어떠한가? 우리 조직 내에 인지 다양성을 떨어뜨리는 형님은 존재하지 않는지, 설마 내가 그 형님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나라 기업의 다양성 현주소는 어떨까? 우리는 국가의 경제력, 문화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위상에 비해 '성 다양성'만은 유독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매년 발표하는 국가별 성 격차 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다. 2024년에 WEF가 발표한 '글로벌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조사 대상 국가 146개국 중 108위를 기록했다. 2022년도에 99위였던 것이 2023년도에는 105위, 작년에는 108위로 떨어진 것이 3년째 연속 하락하는 모양새다. 성 격차 보고서는 '교육', '정치', '보건', '경제참여와 기회', 이렇게 4가지 분야로 구분하여 점수를 매기는데, 이 중 '경제참여와 기회'부문에서 우리나라는 매우 낮은 점수를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남녀 임금 격차와 고위직 여성 비율이 낮은 것이 그 원인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대학 졸업 시 남녀 간 비율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취업 후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등으로 중간관리자의 여성 비율이 떨어지면서 조직에서 유리천장을 뚫고 임원으로 승진하는 비율이 낮은 것이 현실이다.
자산 2조원 이상의 상장회사의 이사회는 특정 성으로만 구성돼서는 안된다는 자본시장법이 2020년 개정돼 2년간의 유예기간을 거쳐 2022년부터 시행됐다. 매출액 500대 기업의 등기 여성 임원 비율은 2019년 3%였던 것이 5년 후인 2024년에 11%로 크게 증가했다. 자본시장법 개정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데이터를 더 깊이있게 들여다보면 상장회사의 여성 사외이사 비율이 16% 증가한 반면, 기업 내부에서 승진한 여성 임원의 비율은 자본시장법 개정 전인 5년 전과 유사한 3%대에 머물고 있다. 기업 내에서 여성 중간관리자를 육성하고 이들을 임원으로 승진시키는 비율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총균쇠'의 저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몇 년 전 우리나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은 인구 5000만명의 국가가 마치 2500만명만 활동하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말로 우리나라 성 다양성의 후진성을 지적한 바 있다.
보스턴컨설팅 그룹의 보고서에 의하면 다양성이 높은 조직은 그렇지 않은 조직에 비해 수익성 측면에서 19% 이상 더 높은 실적을 냈고, 맥킨지 보고서에 따르면 성별 다양성 상위 25% 기업이 평균 이상의 수익을 기록할 가능성은 하위 그룹보다 21% 더 높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양성만 갖추면 조직의 성과는 저절로 높아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포용의 문화가 없는 다양성은 갈등만 조장할 뿐 혁신으로 이끌 수 없다. 다양성과 포용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다양성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특성, 자질, 경험 등의 다름에 관한 것이고, 포용은 각각의 다름에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국 경제와 기업은 이제 'Fast Follower'에서 'First Mover'로, 'Made in Korea'에서 'Designed in Korea'로 성장했다. 그 어느 때보다 창조와 혁신이 필요한 때다. 조직문화는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업에서 다양성과 포용의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이어가야 하는 이유이다.
서지희 이화여대 기술지주 대표 jsuh@ewha.ac.kr
◆서지희 이화여대 기술지주회사 대표=삼정KPMG 부대표, 정부업무평가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위민인이노베이션 회장, 한국공인회계사회 비상근 부회장을 겸하고 있다. 2023년 이화여대 경영학과 초빙교수로 부임해 이화여대 기술지주 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