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크 용산, 대통령의 가을

2024-10-03

끝날 것 같지 않은 여름이었다. 10월이 되자마자 찬 바람이 훅 불어온다. 너무 오랜만의 찬 기운 때문일까. 살짝 닭살이 돋는다. 주섬주섬 옷깃을 여미는데 문득 드는 생각. ‘아, 곧 한 해가 가겠구나! 참, 패딩은 어디 뒀더라?’

세상의 더위는 완연히 꺾였지만 용산의 권력은 여전히 뜨겁다. 지난 2일 윤석열 대통령은 김건희 여사 특검법 등에 대해 24번째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날 저녁에는 한동훈 대표를 제외한 국민의힘 원내지도부와 만찬을 하면서 재표결 표 단속에 나섰다. 같은 날 검찰은 김 여사가 명품가방을 수수한 데 대해 무혐의 처분했다. 준 사람은 끝까지 뇌물이라고 주장했지만 검찰은 끝내 뇌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2일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이다.

윤 대통령은 2022년 5월10일 취임했다. 5년 임기를 일수로 계산하면 1826일이다. 지난 2일은 취임 876일이 되던 날이었다. 임기의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임기 5년의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의 힘이 가장 셀 때는 임기 절반이 되는 취임 후 2년6개월 즈음이다. 아무리 준비된 대통령이라도 초기엔 국정을 이해하고, 요직에 마음에 드는 인물들을 낙점하는 데 혼란을 겪는다. 그러다 두 바퀴 돌고 3년차를 맞으면 어느 정도 시스템이 익숙해지고 내리꽂은 인사들이 공적 조직을 장악하면서 국정 운영에 자신감이 붙게 된다.

박근혜 정부는 임기 중반인 2015년 창조경제, 공공기관 개혁을 밀어붙였다. ‘빚내서 집사기’ 정책을 통해 강력한 부동산 부양책을 편 것도, 담뱃세 인상, 세액공제 도입 등 증세를 실현한 것도 이때였다. 문재인 정부 임기 절반 때인 2019년에는 소득주도성장, 탈원전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됐다. 최저임금이 전년 대비 10.9% 인상되면서 2년 연속 10%를 넘어섰던 것도 이때였다.

과거 청와대에 근무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본격적으로 권력을 맛보면서 그 힘이 영원히 갈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도 임기 절반 즈음이라고 한다. 지나보면 이때가 권력의 ‘정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실 밖 사람들이 슬슬 다음 권력에 곁눈질을 시작하는 것도 이때다. 아직도 절반이 남았다가 아니라 이제 절반도 남지 않았다로 인식이 바뀌는 시점이다. 정권이 강력한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다면 그 시점은 좀 더 뒤로 미뤄지겠지만, 그래봤자 오십보백보다. 늦을지언정 끝내 가을이 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상 조짐은 이미 감지되고 있다. 김대남 전 대통령실 행정관이 지난 7월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를 앞두고 당시 한동훈 후보 공격을 사주했다는 녹취록이 공개됐다. 대통령실은 “대통령 부부와 친분이 없는 사람”이라며 선을 그었지만, 여당은 법적 조치를 예고하며 진상조사에 들어갔다. 역대 정부의 사례로 보면 비선 실세, 혹은 문고리 실세의 이런저런 이야기가 터져나오면서 권력 누수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실금에 불과하지만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콘크리트 같은 벽을 무너뜨리는 모습, 너무나 많았다.

서울대 의대는 의대생들의 집단 휴학을 승인했다. 교육부는 서울대에 대한 감사에 즉각 들어갔지만, 연세대 등 주요 사립대, 부산대 등 지역거점국립대 의대는 ‘타이밍’만 보며 동참할 분위기다. 권력의 힘이 절대적이었어도 이럴 수 있었을까.

경제학에는 ‘피크 오일 이론’이 있다. 원유 생산량이 정점에 도달한 뒤 급격히 감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프로 표현하자면 역U자 형태가 된다. 원유 생산량이 피크를 치자마자 급격히 감소하는 이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원유를 뽑아내기 힘들어지고 품질도 낮아져 비용이 급격히 증가하기 때문이다. 임기제의 권력도 마찬가지다. 절반을 넘어서면 권력이 급속히 약화되면서 그 장악력도 빠르게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만약 리더의 인기가 없다면 권력 약화는 더 가팔라질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정권 막판까지 지지율 40% 고수에 사활을 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윤석열 정부 임기의 딱 절반이 되는 날이 11월10일이다. 고작 한 달여 뒤지만 세상의 풍경은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다. 한여름의 열기는 온데간데없고 떨어진 낙엽이 땅바닥을 스산하게 훑고 다닐 것이다. 이날이 지나면 윤 대통령이 대통령을 할 날은 한 날보다 적어진다. 사람들은 용산의 권력이 아직도 절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이제 절반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할까. 그때 돌아보면 한 달여 전 오늘이 ‘피크 용산’이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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