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한입 깨물며

2024-09-23

한희정, 시조시인

택배 상자가 왔다. 동생이 보낸 사과 상자다. 지난밤 긴 전화 통화 때문인지 상자 무게가 한층 더 무겁게 느껴졌다.

“올해도 기대했는데 가뭄으로 또 망했어. 사과 크기가 자잘해. 큰 걸로 골라서 추석에 제수로 쓸 수 있으면 쓰고….”

아니면 그냥 먹고 말라는 얘기다. 나 역시 퇴직 후 귀농한 남편 따라 해마다 엎치락뒤치락 귤 농사를 짓고 있어 그 마음이 훅 다가왔다.

동생은 노후 준비로 연고 하나 없는 충북 제천 어느 산등성이에 사과밭을 마련했다. 생소한 내륙 지방에 적응하며 제법 재미나게 사과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생각대로만 되는 게 아니었다. 서리가 빨리 내리는 산등성이, 서툰 기술력은 점점 줄어드는 수확량과 변덕스런 날씨에 대응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작년엔 사과 수확을 앞두고 모든 준비를 끝낸, 그날 밤 한 시간이나 우박이 쏟아졌다. 사과 알맹이마다 온통 총알 맞은 것처럼 구멍이 송송 났다. 몽땅 주스 공장으로 실려 갔다는 말을 듣고 내 마음이 구멍 날 정도로 아팠다. 동생 마음은 오죽했으랴. 어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자연의 경고 앞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날씨 영향을 받지 않는 작물이 어디 있으랴만 귤 농사 역시 힘든 고개를 넘고 있다. 시설 감귤은 감귤대로, 노지 감귤은 노지대로 발육 상태도 들쑥날쑥, 낙과, 열과 현상으로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올 농사 망쳤다’, ‘흉년이다’ 아우성이다. 며칠 전 귤 농사하는 후배도 어이없는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우리 과수원은 목화꽃 피어수다.” 어쩌나! 과피의 성장 속도에 비해 속 열매의 생육이 더 빨라 껍질이 터진 거다. 열과 현상이 목화꽃 핀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었다. 어쩔 수 없다지만 속상한 마음이 앞섰다. 올 따라 더 심한 기후 불균형으로 우리 과원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농사는 자연의 몫이 8할이라고까지 하지 않던가.

기후 변화는 절기조차 변하게 했다. 계절의 변화에 맞춰 농사와 일상의 기준으로 삼던 시절은 옛말이 될 정도다. 변하는 기후에 맞춰 농사가 따라가야 한다지만 당장 피해가 크고 농사 자체가 어려워지는 것이 문제다. 누구를 탓하랴. 바로 코앞에 닥친 현실을.

생계를 이어야 하는 농사인데 한숨만 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마침, 지인이 서울에서 기후정의 행진에 참여한다며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 예측 불허의 기상 이변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 삶의 위기와 문제 해결에 대한 요구를 외치고 있었다. 사실 우리가 파괴하고 우리가 바꿔야 할 세상이고 현실인 거다. 지금까지도 가뭄에, 폭염에, 태풍에도 잘 넘어왔다. 더 큰 지혜를 모을 때다. 모두 함께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조금씩 건너가야 한다.

“와삭!” 사과 한입 깨물었다. 다디단 과즙이 입안 가득 고인다.

동생이 흘린 땀방울, 눈물방울이다. 고맙다는 코 인사라도 하려다 물색없이 지나간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