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농업과 로제 카이요의 놀이 이론

2025-10-30

[전남인터넷신문]프랑스의 사상가 로제 카이요(Roger Caillois, 1913–1978)는 프랑스의 지식인이자 사상가로, 문학 비평·사회학·유희론(ludology)·철학 등을 넘나드는 폭넓은 저작 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그의 저작과 연구는 매우 다채로워 유희(play)와 게임(game)에 대한 철학적·문화적 탐구부터, 종교와 신성(sacred)의 사회학, 문학 비평, 환상문학 및 초현실주의(surrealism) 등 여러 분야를 아우른다.

카이요는 특히 유희(play)에 대한 이론을 정립한 점에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인간의 문화를 ‘놀이의 연장선’으로 이해한 그는 저서 『놀이와 인간(Les Jeux et les Hommes)』에서는 놀이를 네 가지로 분류했다. 그것은 아곤(Agon, 경쟁), 아레아(Alea, 우연), 미미크리(Mimicry, 모방), 일링크스(Ilinx, 현기증)이다.

카이요는 놀이라는 행위 속에 인간 사회의 질서와 창조성이 함께 존재한다고 보았다. 놀이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고, 협동과 감정을 배우며, 문화를 발전시키는 근원적 행위라는 것이다.

이러한 놀이의 네 가지 유형은 오늘날의 치유농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치유농장은 흙과 식물, 햇빛과 바람이 어우러진 ‘자연의 놀이터’로, 사람들이 노동이 아닌 놀이를 통해 자신을 회복하는 공간이다. 사람은 흙을 만지고 식물을 돌보며 다시 어린 시절의 감각을 되찾는다.

카이요의 네가지 놀이 중 아곤(Agon)은 경쟁의 놀이이다. 치유농장에서는 참가자들이 누가 더 건강한 작물을 기를 수 있을지, 누가 더 아름다운 화분을 만들 수 있을지를 두고 즐겁게 경쟁한다. 이러한 선의의 경쟁은 성취감과 자존감을 높이며,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 특히 노인이나 발달장애 청소년에게 이러한 경험은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자기효능감을 회복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아레아(Alea)는 우연의 놀이를 의미한다. 농업은 본질적으로 아레아적이다. 씨앗을 심고 기다리는 동안 햇빛, 비, 바람 등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힘이 작용한다. 치유농업의 참여자들은 이 우연 속에서 ‘자연이 결정하도록 맡기는 법’을 배운다. 완벽하게 통제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태도는 심리적 안정과 겸허함을 길러 준다. 아레아는 삶의 예측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치유의 지혜다.

미미크리(Mimicry)는 모방과 상상의 놀이이다. 아이들이 농부 흉내를 내며 밭을 가꾸고, 어른들이 식물의 생장을 관찰하며 마치 자신이 식물이 된 듯 느끼는 순간, 놀이의 몰입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모방과 상상은 창의력과 감수성을 자극하며, 타인과 자연의 감정을 이해하게 만든다. 치유농업의 교육 현장에서는 종종 역할놀이를 활용하여 참여자들이 농부나 자연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이것은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공감과 통찰을 키우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일링크스(Ilinx)는 감각적 현기증의 놀이이다. 자연 속에서 몸의 균형이 흔들리고 감각이 자극되는 순간, 인간은 오히려 쾌감을 느낀다. 흙을 밟는 촉감, 비의 냄새, 바람의 흐름, 햇살의 따스함 등의 경험은 일링크스적 체험이다. 감각의 회복은 심리적 안정으로 이어지고, 긴장된 몸과 마음을 풀어주며 생명력을 자각하게 한다.

로제 카이요의 이 네 가지 놀이 요소는 치유농업의 구조 속에서 조화롭게 작용한다. 아곤은 자존감과 협동을, 아레아는 자연과의 조화를, 미미크리는 상상력과 감성을, 일링크스는 감각의 회복을 이끌어낸다. 치유농장은 이 네 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설계된 ‘삶의 놀이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치유농업은 놀이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되찾는 과정이다. 흙을 만지며 웃고, 자연과 교감하는 그 순간 사람은 ‘노는 인간(호모 루덴스, Homo Ludens)’으로 돌아간다. 카이요가 말한 놀이의 철학은 치유농업의 실천 속에서 되살아나며, 놀이는 낭비가 아니라 생명의 리듬을 회복하는 예술이 된다. 농업이 다시 놀이가 될 때, 인간과 자연은 함께 치유된다.

참고문헌

허북구. 2025. 재미농업과 엔터테인먼트 농업, 농촌의 새로운 무대.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08-31).

허북구. 2025. 농업의 노동, 이젠 치유와 놀이의 자원이다.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08-28).

허북구. 2024. 재미 농업과 놀이.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4-03-06).

허북구. 2024. 재미 농업의 효과.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4-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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