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가 건드린 자존심, 공멸로 되갚다

2025-10-15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유럽과 미국의 상황은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참호전의 처참한 대가로 유럽의 산업과 농업은 피폐해졌지만, 전선 밖에 있던 미국은 전쟁 물자와 식량을 공급하며 전쟁의 최대 수혜국이 되었다.

전쟁 중 미국의 생산력에 의존했던 유럽 각국은 전후 채무국으로 전락했다. 미국은 세계 최대 채권국으로 부상했고, 달러화는 글로벌 기축통화 지위를 굳혔다. 미국의 파워는 금융에 그치지 않았다.

세계 1위 수출국으로 도약했고, 노동자의 1인당 생산성은 영국과 프랑스의 두 배를 넘었다. 전체 제조업 생산의 40%를 담당하며 ‘세계의 공장’으로 자리 잡았다.

중서부 곡창지대도 전쟁 특수를 누렸다. 연합국의 ‘빵 바구니’ 역할로 미국 농산물 수요가 폭등하면서, 기계화 영농을 통한 농장의 기업화가 촉진됐다. 농장주들은 은행 대출로 대규모 투자에 나섰다. 그러나 종전 후 유럽의 농업 생산이 회복되자 역풍이 불었다. 미국산 농작물 수요가 급감해 전후 2년 동안 곡물과 면화의 국제가격이 반 토막 났다. 192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워런 하딩 후보는 농업지대의 절망을 파고들며 압승을 거두었다. 하딩은 집권 후 농장주 지원과 보호를 강화했고, 수입 관세를 평균 38%로 올리는 ‘포드니-맥컴버법’에 서명했다. 명분은 농업 보호였지만 실질적 수혜는 공산품 산업에 돌아갔다.

1920년대 미국 산업은 기술혁신과 보호관세의 시너지로 승승장구했다. 자본이익률(ROE)은 43% 상승했고, 실업률은 4% 이하로 떨어졌다. ‘포효하는 1920년대’로 불린 이 시기, 미국 경제는 전례 없는 호황을 구가했다. 다우존스 지수가 1928년 이후 16개월간 90% 폭등하며 주가도 고공비행을 이어갔다. 하지만 성장의 과실은 산업 자본가와 도시에 집중되었고, 관세 인상의 혜택에서 소외된 농업 경제는 추락을 거듭했다. 1928년 대선에서 승리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지지층인 농민을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했다.

공화당이 상·하 양원을 장악한 가운데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통과되며 관세율은 59%로 치솟았다. 이미 미국의 고율 관세에 불만을 품고 있던 유럽과 캐나다는 즉각 반발해 보복 조치에 나섰다. 이들은 대미 관세 인상과 수입 쿼터 부과로 맞섰다.

미국의 수출은 30% 급감했고, 세계 교역량은 관세 인상 후 3년 동안 75%나 줄었다. 전 세계를 대공황으로 몰아넣은 교역 붕괴는 관세 인상 그 자체보다, 각국의 보복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하딩 시절의 관세 인상에는 참고 넘겼던 유럽 각국이, 자존심이 상하자 전면적인 보복으로 응수했고, 그 파장은 세계 경제 전체를 뒤흔들었다.

김성재 미 퍼먼대 경영학 교수·『관세 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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