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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2

열두 장의 흰 종이를 내밀며 너는 달력이라고 했다 곧 적당한 때가 올 거라고 했다 믿는다고 했다 그중 하나를 뽑았다 계절을 알 수 있는 달도 일곱 개의 요일도 서른 개의 낮과 밤도 없었다 하지만 낮과 밤 없이도 서서히 잠이 쏟아지고 그거 기억나? 나 음악 그만둘 때, 바이올린 없이는 못 살거라 생각했는데…… 너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빈집이었다 아는 집이었다 엄마가 말없이 외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섭섭했던가 냄비 속에서 옥수수가 익어가고 있었다 마당에는 눈이 소복했다 개밥그릇 속에는 사료가 가득했다 개는 없었다 뒷문이 열려 있었다 하지만 뒷문은 어디로도 통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생상스의 협주곡이 들려온다 적당한 때란 무엇일까 서서히 잠이 쏟아진다 네가 준 열두 장의 종이에 꿈 이야기를 쓰려고 했으나 글로 옮기는 순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뭔가를 그만두게 된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았다 한여진(1990~)

네가 “열두 장의 흰 종이를 내밀며”, 이건 달력이야!라고 말하자 시인은 그중 하나를 뽑아 들었다. “계절을 알 수 있는 달도 일곱 개의 요일도 서른 개의 낮과 밤”도 없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였다. 어느 사이 “빈집이었”고, 엄마와 개는 보이지 않았고, 너의 목소리는 멀어지고, 마당에는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뒷문이 열려 있는 빈집에서 시인은 “적당한 때란 무엇일까” 천천히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잠이 쏟아졌다. 꿈속에서 넘쳐나는 “꿈 이야기를 쓰려고 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열두 겹의 새로운 마음들로 1년을 채우기 위해 쓴다. 쓰면서 지워지는 세계. 시인은 다시 쓰기 위해 그동안 쓴 것들을 지운다. 백지의 영혼이 되어, 세상 모든 것들의 이름을 새롭게 부른다. 텅 빈 몸, 텅 빈 영혼이 되어 겨울의 끝을 향해 달려간다. 열두 개의 나침반을 들고 폭설이 내린 길 위에 새 발자국을 찍는다. 다시 눈이 내린다. 백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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