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권일, 농업인·수필가
행복하신가요.
45년 만에 만나 뵈신 아버님께선, 얼마나 반갑게 맞아 주시던가요.
동갑내기 쉰 살 부부. 그 시퍼런 나이에 두 분 갈라놓은 단장(斷腸)의 사별(死別). 그리하여 상사불망(想思不忘)의 결핍과 연모로 몸부림쳤던 45년. 세월의 강 건너 망백(望百)을 앞에 두고 재회한 노부부 아니시던가요. 야속했던 아버님 그 가슴에 얼굴 파묻고, 몇 날 며칠 목놓아 우셨는가요. 이승에서 못다 한 연(緣)이어, 금실 좋은 부부로 영원하자고 손 꼭 잡으셨는가요.
어머님. 중음(中陰) 세계 건너, 마침내 극락왕생의 길로 들어가신 49재일.
산 자의 편의(便宜)를 앞세운 세속(世俗)에 올라 타, 기다렸다는 듯 칠재(七齋)에 탈상(脫喪)하고 돌아오던 ‘하논 봉림사’ 오솔길은, 자욱한 겨울 안개로 희뿌예 눈앞이 아득했습니다. 천애 고아로 살아갈 날 막막하여, 일흔 넘은 자식 까무룩 주저앉을 것 같았습니다.
토란 잎 이슬처럼 허무한 것이 인생이라는 것쯤, 나이 들수록 절실하게 눈치채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만나 풍진 세상 더불어 걸어왔던 지인들이, ‘’먼저 가네‘ 말도 못하고 떠날 때, 회자정리(會者定離)와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숙명 눈물 삼키며 절감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황망해 선뜻 받아들이기 힘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 떠나시던 그 날 아침.
어머님께서는, 여느 날처럼 앞마당을 쓸었습니다. 평생의 ‘루틴’으로, 하루를 여는 경건한 의식 같은 것이었죠. 처마를 잇대고 사는 저에게, 몽돌 해변 바닷물 쓸리는 소리 같이 청량한 빗질과 정갈한 마당 풍경은, 아흔 다섯 노익장이셨던 어머님의 명징한 존재 증명이었습니다.
겨울 초입이라, 날씨 좀 차가웠습니다. 보다 못한 아내가 해 떠오르면 하시라고 말렸지만 오불관언. 아랑곳하지 않고 집안 방 청소까지 깔끔하게 마치시더군요. 그리고는, 느지막히 농장으로 향하는 우리 부부에게, 잘 다녀오라며 자상하신 미소까지 보내 주셨습니다.
농장일 일찍 끝나, 열 한 시쯤 귀가했습니다. 여느 때처럼 어머님 점심 사정 궁금해 가보니, 의식 잃으시고 침대 아래 쓰러져 계시더군요. 화급히 구급차로 병원에 모셨는데, 다행히 의식을 차리셨고, 의사분들도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제야 마음 놓였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 남짓 지나자, 가래 끓어 숨 가누시기 어려워하셨습니다. 고령 환자들에게 오는 급성 폐렴이라며, 임종을 준비하라고 하더군요. 입원 네 시간 만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생 처음 누워보신 병원 침상에서, 가신다는 말씀도 없이 허적(虛寂)의 저승으로 떠나셨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 너무 허술하다는 생각에, 눈물도 나지 않았습니다. 한참 동안 혼자 엎드려, 간절히 명복을 빌 수밖에 없었습니다. 벌써 사무치게 그리워지네요. 극락왕생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