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10월이 되면 한국의 과학자들은 곤혹스럽다.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는데, 한국인 과학자는 번번이 포함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처럼 일본 과학자가 2명이나 수상하면 더욱 불편하다. 언론에서 0:27(한·일 양국의 노벨과학상 수상자 수)이라는 등 한국과 일본의 기초과학 실력을 비교하며, 한국은 왜 아직 노벨과학상을 못 받는지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10여 년 전에 연구기관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상임위원장이 “(노벨상을 못 받은 것에 대해) 장관과 모든 사람이 국민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고 질타한 일도 있었다.
노벨과학상에 대한 한국인의 집착
장기 기초연구 대한 이해부터 필요
일관된 정책으로 연구 여건 만들고
비판적 사고의 창의형 인재 키워야
이처럼 한국인의 노벨과학상에 대한 관심은 유난스럽다. 일찍이 1985년부터 KBS는 ‘노벨상에 도전한다’라는 기획 시리즈를 방영했다. 당시 필자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양자 홀 효과’ 실험을 설명하러 나갔었는데, 진행자가 “우리나라는 이런 실험으로 노벨상을 받을 수 없습니까”라고 질문하기에 주저 없이 “불가능합니다”라고 대답한 기억이 난다. 그 실험에 필요한 초저온 고자기장(超低溫 高磁氣場) 하에서 전기 저항을 측정하는 장비가 당시 한국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이제는 한국 연구 여건도 많이 개선되어서 웬만한 첨단 장비는 모두 활용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더 이상 장비 탓을 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사실 논문 수나 인용 횟수 등 통계적인 수치를 보면 이제 한국과 일본의 기초과학 연구 수준은 거의 대등해 보인다. 예를 들어 클래리베이트사(社)가 발표한 ‘2024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자’에 한국인 과학자는 75명, 일본인 연구자는 78명이 포함되었다. 다만 역사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 일본의 대표적인 기초과학 연구기관인 이화학연구소(RIKEN)는 1917년 설립되었는데, 우리는 2011년에야 기초과학연구원(IBS)을 설립했다. 창조적인 기초과학 업적을 강조하는 노벨상의 특성상, 연구 결과가 나온 후 검증을 거쳐 상을 받게 될 때까지 30~40년이 걸리므로 이 같은 연륜의 차이는 중요하다. 일본은 1970~90년대 경제가 번성할 때 기초과학에 많이 투자했는데, 이러한 투자가 2000년 이후 22개의 노벨과학상 수상으로 결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기초연구에 본격적으로 투자를 시작했으므로, 아직도 노벨상급 연구 결과가 나오기에는 연륜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앞으로 기다리기만 하면 한국에도 노벨과학상이 쏟아질까. 물론 아니다. 노벨과학상급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기존 이론을 뛰어넘거나 성공이 불확실한 분야를 세계 최초로 시도해 장기간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정부 과제는 대부분 단기적 성과를 요구하고, 그것도 정권에 따라 방향이 계속 바뀐다. 과학기술을 경제개발, 산업 발전의 도구로만 생각한 과거의 패러다임 탓이다. 반면 선진국에서는 공공기관의 기초연구비는 긴 호흡으로 지원하며, 영국의 웰컴 트러스트, 미국의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나 카블리 재단같이 장기적으로 기초연구를 지원하는 민간기관도 있다.
이처럼 여건도 갖추어져야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창의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과학자들일 것이다. 사실 역사를 보면 여건이 어려운데도 창의력을 발휘해 노벨과학상을 받은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예가 1930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인도의 찬드라세카라 라만(Raman)이다. 라만은 당시 변변치 못한 인도의 연구 여건하에서 ‘라만 효과’를 발견해 분자 분석의 기틀을 마련했다. 일본인 최초로 194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유카와 히데키도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어려운 상황에서 연구를 진행했다. 심지어 중국인 최초로 201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투 유유는 문화혁명의 혼란한 시기에 중요한 업적을 낸 바 있다.
만일 한국에 이처럼 특출한 과학자가 있었다면 국민의 노벨과학상에 대한 염원이 풀어졌을 텐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한국민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세계적으로 놀랄 만한 성과를 내는 민족이다. 스포츠계에서는 손기정과 박세리 선수가 있고, 산업계에서는 불모지에서 조선산업을 일군 정주영 회장 등 많은 예가 있다. 그런데 유독 과학계에는 왜 그런 영웅이 없을까. 필자는 가장 큰 원인이 비판적 사고를 하는 ‘창의형’ 인재보다 기존 권위에 순종하는 ‘수용형’ 학생을 키우는 우리나라의 교육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교수의 농담까지 필기하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다(이혜정,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 한국 과학자 중에는 소위 이런 ‘모범생’들이 많다. 오죽하면 지난 정부에서 연구비를 삭감할 때 과학자 단체들은 제대로 된 비난 성명 하나 내지도 못했을까. 앞으로는 권위에 당당히 도전하는 젊은 과학자가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오세정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