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임자 없이 공석 된 감사원장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11-11

감사원은 군사 정권의 산물이다. 1961년 5·16 쿠데타 후 2년간 군정을 실시한 세력은 민정 이양을 앞둔 1963년 3월 감사원을 발족시켰다. 그렇다고 없던 기구를 완전히 새롭게 창조한 것은 아니다. 1948년 정부 수립 때부터 존재한 심계원(회계 검사 담당)과 감찰위원회(공직자 감찰 담당) 기능을 합친 것이 바로 감사원의 출발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3년부터 1976년까지 10년도 넘게 감사원장에 육군 출신 인사를 앉혔다. 당시만 해도 미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군부가 한국 사회의 여러 집단들 중 그나마 기강이 잡혀 있고 조직 문화도 선진적이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올곧은 군인들을 감사원장으로 내세워 부패하고 무능한 민간 공직 사회에 새로운 기풍을 불어 넣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1980년대 들어서, 특히 민주화 이후로는 법조인 중에서 감사원장을 기용하는 사례가 늘었다. 1993년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YS) 대통령이 임명한 이회창 감사원장이 대표적이다. 대법관을 하다가 감사원으로 옮긴 것도 특이하지만, 감사원장 재임 10개월 만에 국무총리로 ‘깜짝’ 발탁되며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다. 판사 시절 강직하고 청빈한 성품 덕분에 ‘대쪽’으로 불린 이회창의 상품성을 YS가 십분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다만 사법부를 떠나 행정부, 즉 감사원으로 옮긴 결단이 ‘인간 이회창’에겐 마이너스로 작용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감사원장과 총리를 지낸 경력 때문에 대통령 후보도 되고 정당 대표도 됐지만, 대권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정치인으로선 명백히 실패한 삶을 산 것이다.

김대중(DJ) 대통령이 한승헌 변호사를 감사원장으로 뽑은 것은 가장 성공적인 인사로 꼽힌다. 감사원장으로서 한승헌의 임기는 1998년 8월부터 1년 1개월 정도에 그쳤으나, 이 기간 감사원의 위상은 부쩍 높아졌고 직원들 사기도 많이 올랐다. 한승헌은 오랫동안 DJ와 알고 지냈지만 DJ도 대하기 조심스러워 할 만큼 꼿꼿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대통령이 그럴 정도이니 행정부 다른 공무원들에게 감사원은 호랑이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한승원은 원래 65세이던 감사원장 정년을 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과 동급인 70세로 연장하는 수완까지 발휘했다. 감사원이 헌법상 독립 기구인 대법원·헌재와 대등해진 셈이니 어느 감사원 직원이 쌍수를 들어 반기지 않았겠는가.

최재해 감사원장이 4년 임기를 마치고 11일 물러났다. 윤석열정부에서 현 이재명정부로 정권이 바뀐 뒤에도 임기를 다 채웠으니 다행스러운 일이긴 한데 뭔가 허전하다. 후임 감사원장이 임명되기는커녕 그 후보자조차 내정되지 않았으니 감사원 직원들은 앞날이 막막하고 마음이 울적할 것이다. 바로 이 점을 감안한 듯 최 원장은 퇴임식을 비공개로 진행했다. 그는 감사원 창립 후 내부 인사 출신으로는 처음 조직 수장에 앉는 영예를 안았다. 동시에 재임 중 정치적 중립 의무 위반 등을 이유로 국회 탄핵소추를 당한 최초의 감사원장이 되는 수모도 겪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새 감사원장 후보로 누구를 지명하는가는 공직 사회 사정(司正)에 대한 현 정권의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유추해 볼 가늠자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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