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버풀 항만 지구에 위치한 브램리 무어 도크. 영국 축구의 전통 구단 에버턴 FC는 이곳에 5만2000석 규모 신축 구장을 짓고, 오는 2025-26시즌부터 구디슨 파크를 떠난다. ‘블루 월(Blue Wall)’이라 불리는 단일 남쪽 스탠드, 산업도시 리버풀을 상징하는 벽돌 기단부, 어느 자리에서든 막힘 없는 시야 등 홍보 영상 속 새 구장은 첨단성과 지역 정체성을 동시에 내세운다. 가디언은 “새 경기장이 구단의 미래를 약속하고 도시의 재생을 이끌 것이라는 기대는 과연 현실적인가”라고 반문하며 “팬들의 향수를 지우고 도시 공공재를 빨아들이는 ‘스포츠 스타디움 신화’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고 30일 바판했다.
△도시는 재생되지 않고, 구단만 탈출한다 : 에버턴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유럽과 북미 곳곳에서 축구와 미식축구, 야구, 농구 구단들이 경쟁적으로 ‘새 경기장 짓기’에 나서고 있다. 당국은 이를 도시 재생의 기회로 포장한다. 고용 창출, 지역 이미지 제고, 민간 투자 유치 등 화려한 수치가 동원된다. 하지만 여러 연구들은 이 같은 주장을 부정한다. 신축 경기장이 지역 경제에 미치는 긍정 효과는 거의 없거나 일시적이며, 오히려 기존 상권의 소비가 재편되는 수준에 그친다는 분석이다. 도심 외곽으로 이전한 경기장은 이웃 지역 경제를 단절시키고, 공공재원이 스타디움 건설로 쏠리며 교육·주거 예산이 줄어드는 역효과도 발생한다.
△모든 구장이 똑같다… 팬 문화의 획일화 : 에버턴이 설계한 블루 월은 독일 도르트문트의 옐로 월,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의 남쪽 스탠드와 매우 닮아 있다. 가파른 단층 구조로 팬들의 열광을 유도하는 이 구조는 최근 북미와 유럽 스타디움 설계에서 거의 필수 요소처럼 자리잡았다. 설계 역시 획일화되고 있다. 최근 대형 스타디움은 모두 소수 설계사들이 반복적으로 설계한 결과물이다. 팝큘러스, 마니카, 포스터앤파트너스, 댄 마이스 등이다. 모양은 달라도 구조는 비슷하고, 감정 동선도 유사하다. 불편함을 감수하던 낡은 구장의 팬 문화는 사라지고, 표준화된 ‘소비자형 응원’만 남는다.
△부담은 지역이 지고, 이익은 구단주가 가져간다 : 경기장 건설 비용은 점점 치솟고 있다.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은 12억 파운드, 시카고 베어스의 새 구장은 32억 달러로 책정됐다. 미국에서는 이 비용의 상당 부분을 지방 정부의 세금 면제 채권으로 충당한다. 결과적으로 이익은 구단이 가져가고, 위험은 지역이 떠안는 구조가 완성된다. 티켓 가격과 식음료 비용은 오르고, 경기장 방문은 일상이 아닌 ‘사치’가 된다. 지역사회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새 경기장이 바꾸는 것은 팬의 구성과 정체성이다. “구디슨 파크의 정체성은 철거되고, 에버턴은 완전히 다른 클럽이 된다”고 주장하는 팬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스타디움은 현대 도시의 탈출 캡슐인가 : 에버턴의 새 경기장은 외형적으로는 지역 산업 유산을 계승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지역 재생’이라는 명분 아래 도시로부터 이탈하는 구조물이 됐다. 투자자들에게는 보증된 수익원이지만, 지역 주민에게는 교육과 복지보다 우선순위가 높은 ‘그들만의 공간’이 됐다. 전통, 공동체, 뿌리. 새 구장은 늘 이 단어들로 자신을 포장한다. 그러나 공용 공간으로서의 경기장은 이제 대형화되고 고립된 ‘탈출선’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 구장 안에서, 그 팀은 과거의 자신과 작별을 고한다.